나는 왜 뜻 없는 것들로 무한을 보려 하는가 [연속 공개인터뷰]  문장웹진 2015년 11월호

​나는 왜 뜻 없는 것들로 무한을 보려 하는가?
–  시인 이제니 편   

정리 : 안희연(시인)
인터뷰 일시: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차디찬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저의 이십대 시절, 이제니 시인의 첫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는 부표이자 난류였습니다. “이 슬픔을 따라가면 고아의 해변”(「고아의 말」)에 당도한다는 문장을 따라 읽다 보면, 나는 누구일까,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 걸까,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런 정답 없는 고민들이 나를 위협해도 괜찮았어요. 시인이 간절하게 꿈꾸는 세계는 지금 이곳이 아니라 아마도 멀리 있는 곳, 그러므로 끝내 다다를 수 없는 미지의 세계였으니까요. 저도 그곳으로 함께 헤엄쳐 갔어요. ‘슬픔의 순간에도 운율만은 잊지 않’(「네이키드 하이패션 소년의 작별인사」)아야 한다고 말하는 시인의 손을 잡고서요.

두 번째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가 나왔을 때도 그랬습니다. 모르는 사람 모르게 벌어지는 일들을, 빛으로 걸어가 빛이 되어 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은 뭉클했고 서러웠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어요. 왜 이 시인은 뜻 없는 것들로 무한을 보려 하는 걸까, 그녀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을까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물음들. 멀리 거제에서 오신 이제니 시인이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네요. 이런 귀한 기회를 놓칠 순 없죠! 토끼처럼 귀를 쫑긋 열고 그녀의 이야기를 받아 적었습니다. 한 글자도 남김없이, 사랑을 담아.  

▶ 이영주 : 오늘은 《문장 웹진》 공개인터뷰 [나는 왜]의 마지막 행사입니다. 《문장 웹진》에서는 매달 한 분의 시인 혹은 소설가를 모시고 그 작가의 작품세계를 조망해 보는 시간을 마련해 왔는데요. 지난 2년간의 행사가 오늘부로 마무리됩니다. 유종의 미를 거둘 오늘의 초대 손님은 이제니 시인입니다. 이제니 시인은 1972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페루」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를 펴냈고요.

▶ 이제니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이영주 : 이제니 시인의 근황을 여쭈며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 이제니 : 특별한 것은 없구요. 단조롭고 단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문예지 겨울 호 마감 기간이기도 하고, 오래전에 계약해 둔 산문집 원고도 있고 해서 그 원고들을 쓰고 있구요. 이번에 서울에서 일주일 정도 머물 예정이어서 오기 전까지 원고를 써놓고 오느라 마음이 좀 바빴습니다.   

▶ 이영주 : 이제니 시인은 현재 거제도에 거주하고 계신데, 여러분들을 만나려고 버스로 4시간 넘게 달려오셨어요. 정말 먼 길을 와주셨는데요. 저도 전에 이제니 시인을 뵈러 거제도에 간 적이 있는데 정말 멀더라고요. 거제도에는 왜 KTX가 없는 걸까요? 아무쪼록 오늘 이렇게 와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이제니 : 저도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

​보통 책 출간 후에는 낭독회나 독자와의 만남 같은 자리가 마련되고는 하는데, 이번에는 모두 다 나중으로 미루거나 거절을 했어요. 써야 할 원고가 많기도 했구요. 시집이 나오자마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유로운 읽기를 방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구요. 그런데 이 행사는 이영주 시인이 진행하는 것이라 마음이 편하기도 했고, 또 소규모 모임으로 진행된다고 해서 그 소수의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이 나온 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기도 해서 뭔가 얘기를 해볼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구요.   

▶ 이영주 : 왠지 박수를 쳐야 할 것 같은 분위기네요. 쑥스러우니까. (웃음) 거제에서도 일상은 똑같군요. 그럼 본격적으로 시집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두 번째 시집을 내기 전과 후, 어떤 변화가 있던가요? 주관적인 상황도 좋고 시인의 마음의 움직임도 좋습니다.  

▶ 이제니 : 시집을 낸 이후와 이전이 그렇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오래 묵은 것들을 묶어내서 후련한 마음 같은 것은 있었어요. 첫 시집 나올 무렵부터 「나선의 감각」을 쓰기 시작해서 2011년 봄에 「나선의 감각」 연작들을 많이 발표했었는데요. 당시에는 이 연작들로 채우면 두 번째 시집을 빨리 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었죠. 그런데 그사이 이런저런 일들이 생겨서 두 번째 시집이 생각보단 늦어졌어요.

이번 시집이 첫 시집과는 톤이 다르기도 해서, 이전처럼 읽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독자가 없는 곳으로 간다는 그런 각오를 하고 있었는데 호의적으로 읽어 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요즘은 세 번째 시집 원고를 정리 중인데요. 그래서인지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번째 시집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뭔가 오랜 옛일에 대해 말하는 것 같은 그런 느낌도 듭니다.   

▶ 이영주 : 아니 벌써 세 번째 시집을 준비하신단 말예요?

▶ 이제니 : 네. 책이 언제 어떤 형태로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원고는 정리하고 있어요.   

▶ 이영주 : 그러면 두 번째 시집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조금 낯설게도 느껴지시겠네요.   

▶ 이제니 : 네, 그런 느낌이 듭니다. 요즈음은 두 번째 시집과는 또 다른, 이후의 무언가를 쓰고 있는데, 그러니까 어느새 글쓰기의 몸이 바뀌었다고 할까요. 아무튼 두 번째 시집과는 또 다른 흐름 속에 있어서인지, 두 번째 시집이 새삼 새롭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 이영주 : 거리를 두고, 조금 낯선 상태로 이야기하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제목에 관한 건데요. 대부분 시집의 제목은 명사형이거나 단답형인 경우가 많은데 이제니 시인의 시집 제목은 열려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목을 정할 때 어떤 기준이 있나요? 시집 제목에 얽힌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이제니 : 제목은 직관적으로 정하는 편입니다. 단어나 문장이 먼저 떠오르고 난 뒤에 시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어나 문장이라고 했지만, 그 하나의 단어, 한 줄의 문장이 제게는 하나의 완결된 세계처럼 느껴지고는 합니다. 단어나 문장이 어떤 공간을 열어 보여주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두 번째 시집 제목도 문득 떠오른 제목으로 써내려간 시편을 표제작으로 한 것이에요. 친한 동료 작가들은 제목에 ‘왜냐하면’ 같은 접속부사가 들어가는 것이 군더더기처럼 느껴진다고 다른 제목은 어떠냐고 묻기도 했는데, 왠지 꼭 이 제목이어야만 될 것 같다고 얘길 했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 이영주 : 제목이 정말 좋아요. 시가 좋으면 제목도 좋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웃음) 그런가 하면 이제니 시인의 시세계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말놀이, 반복, 리듬의 시학일 텐데요. 특별한 의도가 있는가요?   

▶ 이제니 : 어떤 특별한 의도나 전략을 가지고 써내려가는 것은 아니에요. 시라는 것이 그렇게 전략을 가지고 씌어지는 것도, 전략적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닐 테고요.

​어떤 언어적 상황에 처한 사람이 그렇게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써내려간 것이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런저런 인터뷰에서 리듬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시라는 것이 문자로 된 리듬이 아닐까, 라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리듬이라는 것은 하나의 세계에 육박하려는 언어적인 에너지 그 자체이자, 시인 저마다의 고유한 언어 운용 방식, 호흡, 심장박동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제 시편들에 대해 평을 할 때, 음악적이다, 라는 말씀도 많이 하시는데, 점층적으로 상승하거나 하강하는 듯한 어떤 리듬 속에서 단어와 단어가 원래의 의미를 벗고, 소리와 소리의 연쇄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나아간다는 점에서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반복이나 리듬은 제게는 생래적인 기질 같은 것이기도 하구요. 제 말법 자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글을 쓸 때 좀 더 적확한 수사를 동원하거나, 치밀하고 섬세하게 묘사하려고 한다면 말하려는 의미를 조금은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저에게는 그런 식으로 써나가려는 생각이 애초에 희박하기도 하구요. 의미가 조금은 훼손되거나 불분명해지더라도, 의미에 앞서 어떤 말의 에너지, 그런 음성적인 결이 잘 흐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문장들을 써내려가면서도 중얼중얼 읽어 나가면서 리듬을 거스른다고 느껴지는 단어나 문장들을 자꾸만 가지치기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런 가지치기라는 것이, 실은 같은 말을 계속 반복 변주하는 것과 그리 다를 바 없는 것이기도 하구요. 그러다 보니 시가 난해하다거나 자폐적이다, 라는 말도 많이 듣는데, 저에게는 저만의 리듬을 따라가는 것이 오히려 의미를 더욱더 뚜렷하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두 번째 시집은 초등학생도 쓸 수 있는 지극히 단순한 언어로 쓰자, 라는 생각을 했는데요.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의 의미에 붙들리지 않더라도 한 줄 한 줄, 한 편 한 편 흘러가는 그대로, 말의 운동 그 자체를 따라가는 동안에 무언가 마음을 두드리는 듯한 심리적인 타격감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이영주 : 이제니 시인의 말투에서 묘한 매력이 느껴지시지요? 문장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것이, 말투가 시와 똑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쯤에서 독자 분의 낭독을 들어 볼까요? 어떤 시를 고르셨나요?
  

착한 개는 돌아본다
  

맑은 샘의 표면으로부터 솟아나는
숲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꿈속
아니
영속

너는
맨발로
목소리도 없이
번지는 숲 그림자로

다투어 피어나고
모르는 사이 사라진다

아슴푸레 멀어져 가는
어른거리는 빛

너의 곁에는
착한 개가 한 마리 있어
착한 개야 하고 부르면
착한 개는 돌아본다

가장 가까이에서 솟아오르는
어쩌면 내 가슴속에서 들려오는

이번 생은 흐릿하구나
그것은 잡을 수 없는 것이구나
너의 표정을 읽었을 땐
이미 꿈속에서 건너온 뒤였고

부드러운 나무 냄새라고
착하고 맑은 눈길이라고

차디찬 샘물에 얼굴을 묻고
너는 꿈속의 숲 속으로 걸어갔다  

▶ 이영주 : “착한 개야” 하고 부를 때, 시인이 쪼그려 앉아서 착한 개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시에 시인의 말투가 녹아들어 있네요.

▶ 이제니 : 어릴 때부터 개를 좋아했어요. 오래 계속 기르기도 했구요. 길거리에 개들이 지나가면,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그저 “개야” 하고 작게 불러 보고는 합니다. (웃음) 이 시편도 실제로 거리를 가다가 낯모르는 개가 어떤 문 앞에 앉아 있기에 “착한 개야.” 하고 불렀는데 그 개가 돌아보더라구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서 ‘착한 개야 하고 부르면 착한 개는 돌아본다’라고 썼지요. 뭐랄까. 너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너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와도 같은. 어떤 존재에게 이름을 붙여 주면 그것은 그 이름 안에 속하는 무언가가 되잖아요. 무언가에 갇힌다고 할 수도 있겠구요. 실제로 그날 돌아봤던 개는 왠지 좀 슬프고 화가 난 듯한 표정이긴 했지만요. (웃음)  

▶ 이영주 : 그런가 하면 이제니 시인의 시집은 ‘처연함’의 정서가 지배적입니다. 첫 시집에는 그것이 발랄한 감각으로 감춰져 있었던 것 같은데 두 번째 시집에서는 그 정서의 농도가 더욱 깊어졌어요. 어떤 이유가 있었을까요?

▶ 이제니 : 색으로 비유를 하자면 첫 시집은 분홍의 세계, 두 번째 시집은 잿빛의 세계라고 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첫 시집도 들여다보면 분홍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조금은 서늘한, 검은색에 가까운 푸른색 같은 것이 아닐까 싶지만요. 아무튼 첫 시집을 내고 난 이후에 여러 일들이 있었어요. 시베리아로 여행을 갔다가 큰 사고를 당해서 오랫동안 누워 지내기도 했구요. 20년 넘게 가족같이 키우던 개도 죽고. 또 오래 살았던 집에서 이사를 하기도 했구요. 평소에 타로카드 보는 걸 좋아하는데, 그 시절을 카드에 비유하자면, 그야말로 ‘죽음 카드’에 해당되는 시기가 아닐까 싶어요. 물론 죽음 카드는 재생이라는 말과 그리 다르지 않지만. 아무튼 좀 힘든 시기를 지나왔는데, 그렇지만 그런 상황들이 시집에 직접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러나 뭐 어쩔 수 없이, 당연하게도, 그런 분위기가 시집 전반에 묻어난 것이겠지요. ​

​사고를 당하기 며칠 전에 어떤 문예지 겨울 호에 시론을 써서 보냈는데, 사고 후로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다가 일 년쯤 뒤에 그 문예지를 읽게 됐는데, 그 시론의 마지막 줄에다, “인생에서 몇 번의 죽음을 간직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운이리라.”라고 적었더라구요. 뭔가 오싹한 기분도 들면서, 큰 사고를 겪고 나니 내가 쓴 문장이 내 삶을 이끌고, 내 삶이 내 문장을 다시 이끌고 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던 것 같아요. 쓴다는 것의 무시무시함 같은 것도 다시금 느꼈던 순간이기도 했구요.   

▶ 이영주 : 이제니 시인이 개인적으로 말하기 꺼리는 이야기를 꺼내 주셨네요. 그런 개인적인 고통의 시기를 겪으면서, 시도 삶을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온 것 같아요. 한편 이제니 시인은 언어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지닌 시인이고, 언어를 통해, 언어 안에서 태초의 어떤 것을 찾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 보입니다. 이제니 시인이 생각하는 ‘언어’는 어떤 것인가요? ‘언어’에 대한 이제니 시인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 이제니 : 언어를 다룰 때면 언제나 어떤 지극한 결핍의 감정을 느낍니다. 언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그렇게 완전하게 관념 그대로를 표상하지 않거든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기미와 전조뿐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두 번째 시집에 있는 ‘돌멩이’나 ‘구름’이라는 보통명사가 ‘슬픔’이나 ‘죽음’과 같은 추상적인 관념어와 그 무게 면에서 그리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언어라는 것은, 시라는 것은, 그 자신의 몸을 통해서 어떤 무언가에 도달하려고 하는 지속적인 움직임 혹은 시도인 동시에 도달하고자 하는 그것 그 자체라고도 느껴집니다. 그러나 순간순간 밀려날 수밖에 없는, 선행되는 그것에 비하면 늘 뒤늦을 수밖에 없는 무엇이기도 하지요. 써지지 않는 무언가를, 쓸 수 없는 무언가를, 쓰려고 할 때면 손톱으로 벽을 후벼 파고 있는 듯한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조금씩 더 더 말해 보려고 하는 어떤 태도 같은 것이랄까. 그렇게 내 자신의 한계를 아주 조금씩만 넘어가 보자고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미련하게 써내려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언어는, 특히나 모국어인 한글은 어렸을 때부터 읽고 쓰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해서 제 몸과도 같은 무엇으로 여겨집니다. 언어 서번트는 언어를 색깔로도 보고 소리로도 듣고 심지어 냄새로도 인지한다고 하는데, 완벽히 아름다운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 저로서는 잘 알 수 없지만, 제게도 단어나 문장이 시각적인 형태로 느껴지거나 소리로 다가오는 경우가 많아요. 특히나 한글은 음성적인 요소와 음운의 시각적인 형태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같이 맞물려 가는 것이기도 하구요. 아무튼 보편적인 일상어들이, 어떤 시적인 순간들이, 시라는 장르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서 문득 어떤 언어의 틈 속에서, 어떤 시간과 시간의 주름 사이에서 환기되는 어떤 특별한 순간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계속해서 뒤쫓고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 이영주 : 한글을 좋아하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한글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재미를 정말 잘 살리시는 것 같아요. 「그을음 위로 그 울음이」 같은 제목이나 ‘울음을 물음으로 발음하는 사람아’ 같은 구절들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워낙 언어를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런 감각이 시 안에 스미는 것 같아요. 그럼 시인의 육성을 들어 볼까요? 어떤 시를 고르셨나요?
  

모르는 사람 모르게   

눈을 감는다. 무언가 보기 위해. 무언가 듣기 위해.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색깔들. 어둠은 어둠만이 아닌 들판들.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 같은 것. 속도에 몸을 맡긴 채 체념하듯 앉아 있던 어두운 기차간 같은 것.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 눈을 뜨면 그날의 양 떼들도 다 사라지겠지. 녹색의 들판에서 하름하름 풀을 뜯어 먹던. 한가로이 울면서 구름 곁으로 번지던. 잠든 적이 없는데도 꿈을 꾸었다. 깨어나 보니 다시 꿈속이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습니다. 이제 당신을 읽겠습니다. 저 나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웃지만 우는 얼굴이었습니다. 마음의 본성은 거울과 같습니다. 당신은 신성한 사람입니다. 가만히 있는데도 끝없이 떠내려가는 것만 같습니다. 오래도록 누군가의 입을 빌려 말해 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구운 식빵과 삶은 달걀 하나면 족합니다. 불면증이 오래되었습니다. 너무 일찍 일어났습니다. 제대로 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마음이 정화된다면 있는 그대로의 무한한 세계를 보게 될 겁니다. 이팝나무 길을 걸었습니다. 흰 꽃을 좋아하면 슬픈 인생을 살게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려놓고 싶지만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 있습니다. 너와 나는 다른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반성한다는 것은 여전히 어제 속에 머물러 있다는 말입니다. 일곱 번째 차크라가 열렸습니다. 언제쯤 돌아갈 생각입니까. 말의 뜻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끝이 곧 시작입니다. 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떨어지는 것은 눈물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은 원래 비어 있는 것입니다. 불을 켤 수도 끌 수도 없습니다. 보라색은 가장 높은 단계의 영성을 드러낸다고 합니다. 제비꽃을 좋아하던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거울은 바닥에 놓여 있습니다. 상자는 탁자 위에 있습니다. 넝쿨 식물의 꽃은 높은 곳에 있습니다. 불행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깃발은 바람 속에서 휘날립니다. 말과 말 사이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부분은 옷을 잘 차려 입지 못한 미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힘이 넘치는 실패자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고대의 치유사들은 균형 잡힌 무의식의 힘과 날개 달린 초의식의 시야를 갖춘 헤르메스의 수정 지팡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습니다. 자연과 인간이 찰나 속에서 남기고 간 것을 무엇이라 부를 수 있습니까. 편한 것보다 힘든 것이 더 좋습니다. 깊이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단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습니다. 각각의 태양은 신의 생각이고 각각의 행성은 그 생각이 드러난 모습입니다. 모르는 사람의 모르는 얼굴을 떠올려 본 적이 있습니까. 계속 걸어가겠습니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끼친 해악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라다니게 될 겁니다. 어떤 부분집합들은 그 자체로 원소의 개수가 무한합니다. 밤하늘은 왜 밝지 않고 어둡습니까. 꽃병을 대신할 유리병이 필요합니다. 상자 속에는 또 다른 상자가 들어 있습니다. 누구나 웃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기다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기대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돌이킬 수 있습니다. 누구나 묻힐 수 있습니다. 누구나 묻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먹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죽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손톱을 깎아야만 합니다. 말하려고 했던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수많은 상대적인 진리입니다. 모든 것은 있는 그대로 다 완전하고 아름답습니다. 다시 한 번 두 손을 맞잡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당신 자신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한 낱말 위에 한 낱말이 겹치면서. 한 목소리 위에 한 목소리가 흐르면서. 달아나는 말 위로 스며드는 물. 스며드는 물 위로 내려앉는 말. 얼음과 구름. 죽음과 묵음. 결국 헤매다가 죽게 될 것이다. 모르는 사람 모르게 살아가듯이. 모르는 사람 모르게 죽어가듯이. 커튼은 잿빛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탁자는 흑백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이것을 빛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어둠이야말로 내 마음이다. 눈을 감는다. 다시 눈을 감는다. 내 눈 속의 어둠과 함께. 너의 어둠과 함께. 어둠 속에서 어둠 속으로.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
  

▶ 이영주 : 시가 긴 편인데도, 시와 목소리가 너무 잘 어울려서 푹 빠져서 들었어요. 시의 뉘앙스를 가장 잘 구현해 낸다는 점에서 시인의 낭독은 중요한 것 같습니다.   

▶ 이영주 : 한편 이제니 시인의 시는 문장이 문장을 불러오고 물결치듯 흘러가는 것이 특징입니다. 어떤 시인은 이제니 시인의 시를 일컬어 시의 의미를 해석하지 못하면 독서에 실패했다고 여기는 강박을 줄여 주는 것 같다고 표현했는데요. 이제니 시인은 ‘소통’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가요? 독자와의 소통이 어떤 형태이길 바라시는지.  

▶ 이제니 : 아까도 잠시 말했듯이 제 시집은 조금은 불친절한 시집일 수도 있어요. 단조롭고 단순한 단어들이 반복되는데도 불구하고 의미를 드러내려는 시도는 희박하니까요. 그러나 몸과 마음을 좀 열어 두고, 그렇게 조금은 느슨한 마음으로, 어떤 전형적인 독법에서 벗어나서, 시집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돌돌돌 굴러가는 그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확정적인 진술로써는 드러낼 수 없는 어떤 감정의 결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한 편의 시라는 것은 첫 줄부터 마지막 줄까지 유기적인 그 무엇이어서 하나의 잠언처럼 떼어내서 읽히거나 낱낱으로 떨어져서 분석될 수 없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시집을 엮을 때도 배치 문제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입니다. 처음에는 좀 가벼운 시편들을 놓고 뒤 페이지로 갈수록 무거운 시편들을 배치합니다.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심장박동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요. ​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줄줄이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에 책을 탁 덮었을 때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순간순간 흘러가는 어떤 감정의 결 같은 것이 느껴진다면 그것으로도 족하다, 라고 생각했어요. 시집치고는 두꺼운 편인데, 저 역시도 말하려고 하는 무엇이 분명히 있고, 또 그것을 쓰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나 많은 페이지들을 썼는데도 결국은 아무 말도 쓰지 않았고 아무 말도 쓸 수 없었다는 것을 느끼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수다한 말들 속에서 점점 침묵으로 나아가는 그런 세계라고 할까요. ​

​시적 인식 혹은 시적 대상이 불분명하다, 라고 말할 수도 있을 테고, 또 중심이 없는 세계다, 라고 말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모호하고 흐릿하지만 어떤 일관된 리듬 속에서 어렴풋하게 수렴되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제게 시적 이미지라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대상 혹은 풍경이기보다는 움직이는 말의 몸 그 자체, 그 말의 움직임 그것 그대로가 제게는 시적 이미지로 느껴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언어적인 말더듬이 상태에 직면한 채로 자기 지시적인 말들을 반복하면서, 나무는 나무야, 바람은 바람이지, 구름은 구름이야, 계속 중얼거리면서 나아가는, 무화되면서 무한히 뻗어 나가는, 무한히 나아가면서 점점 무화되는, 그렇게 나아가면서 어딘가에 도달해 보려는, 어떤 사물의 본질에 가까워지려는, 어떤 안간힘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구요. ​

​그렇지만 또 그 단조로운 문장들 속에 뭔가 보물을 숨겨 놓듯이 어떤 희미한 문장들을 흩뿌려 놓았는데, 그런 부분들까지도 하나하나 찾아내서 읽어 주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그럴 때면 뭔가 영혼과 영혼이 이어져 있다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이제 겨우 두 권의 책을 냈을 뿐이지만, 책이라는 것이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느끼기도 하구요.   

▶ 이영주 : 시집의 배치를 ‘절정을 향해 나아가는 심장박동’이라고 표현하신 게 재밌네요. 배치 방식을 육체적인 부분과 연결시키는 게 참 좋네요. 저는 이제니 시인의 시에서도 충분히 의미가 생성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고정되지 않을 뿐이지요.

한편 이제니 시인의 시에는 잠언 투의 문장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요. 그런 문장을 즐겨 사용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 이제니 : 잠언의 진리의 값에 주목한 것이 아니에요. 잠언은 보통 절대적 진리나 깨달음을 드러내는 말, 깊이와 무게를 지닌 고정되고 확정된 말이라고 알고 있잖아요. 그러나 이 세계는 절대적인 진리가 아닌, 어떤 순간의 진실만이 매순간 흐르고 있을 뿐이잖아요. 잠언이라는 건 또 다른 진실이 나타나기 전까지만 유효한 어떤 잠정적인 말일 뿐이거든요. 그런 연약하고 불완전한 말들에 간신히 기대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지만.​

아무려나 그렇게 진리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언어 역시도 특히나 시라는 형식 안에서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이라는 것이 홀로 서 있는 절대적인 무엇이 아니거든요. 어떤 문맥 속에서 의미를 지니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적인 진실의 말이라고 학습해 왔고 당연하게 믿어 왔던 그 잠언이라는 것이 시라는 장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다른 일상적인 말들, 매뉴얼과도 같고, 기계적인 안내문, 건조한 지시문과도 같은 말들과 뒤섞이면서 그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허술하고 텅 비어 있는 말인지 드러내고 싶었어요. 그렇게 잠언이라는 것이 어떤 문맥 속에서는 미친 자의 목소리, 혹은 병자의 중얼거림처럼 읽힐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그 역으로, 보편적이고 상투적인 일상어들이 잠언과 뒤섞일 때, 이전에는 환기되지 않았던 돌연한 긴장과 색채를 발하면서 어떤 말하기 힘든 아름다움 혹은 슬픔으로 수렴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런 순간들을 밝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 이영주 : 시를 쓰다 보면 잠언을 쓰고 싶은 유혹을 많이 느끼거든요. 그런데 잠언에서 출발해서 그것이 파생하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잠언을 쓰고 싶은 욕망만 있으면 실패하기 쉬워요. 그런데 이제니 시인은 현명한 방식으로 잠언을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나선의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볼게요. 시집에 「나선의 감각」 연작이 체계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요. 시인이 생각하는 ‘나선의 감각’은 무엇인가요? 나선형의 운동성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 이제니 : 「나선의 감각」 연작들을 간단히 말해보자면, 일종의 시론으로서의 시, 메타시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나선의 감각」 연작들은 물론이고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시편들 대부분이, 형식 그자체가 내용이고, 내용 그자체가 바로 형식인 그런 구조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글의 처음과 끝이 맞닿아 있어서 마지막 문장을 읽고 다시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읽더라도 어색하지 않은 흐름으로 씌어진 것들이 대부분이구요. 「나선의 감각」 연작은 그런 나선의 운동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선이나 면, 도형 같은 기하학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다가 일본의 그래픽 디자이너인 마쓰다 유키마사가 쓴 『눈의 황홀』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어요. 그 책의 여러 이미지들과 다양한 요소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세계를 바라보는 통찰력 있는 시선이 제게 영감을 주기도 했구요. 나선이라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아주 흔한 이미지잖아요. 물결의 소용돌이라든가, 조개껍데기라든가, 거미집, 나비의 입도 그렇고, 우리 인간의 몸에도 손가락의 지문이라든가 머리의 가마라든가 하는 나선의 문양이 있구요. 나선이라는 것은 그렇게 세계의 본질과도 닿아 있는 흐름이고, 생명 에너지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나아가서는 만취의 감각, 쾌락의 이미지이기도 해요. 가령 미친 사람들, 만취한 사람들의 걸음걸이나 몸의 흔들림, 더 나아가서는 사람인데 또 사람만은 아닌 존재들, 영매, 무당, 예언자, 신들린 자의 기운과도 닮아 있구요. 그런 나선의 형식 혹은 감각을 통해서 어떤 전형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신비주의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과 끝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간 처음의 문장이 처음에 읽었던 그 처음의 문장이 아니고, 마찬가지로 끝이 끝이 아닌 세계를 드러내는 시편들을 통해서 뭔가 명확하게 의미로 잡혀지지는 않지만 문득문득 마음을 두드리는 무언가가 문장에 깃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영주 : 말씀을 듣다 보니 시인 내면의 소용돌이도 나선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역시 시인들은 세계를 파악하고 만들어 가는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제 인터뷰도 막바지를 향해 가고 있는데요. 세 번째 시집을 준비 중이라고 하셨는데, 세 번째 시집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가 있다면 살짝 소개해 주세요.   

▶ 이제니 : 아직 나오지도 않은 책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 조심스럽기도 하고 또 미리 말하고 싶지 않기도 한데요. 아무려나 제가 앞서 「모르는 사람 모르게」라는 시를 읽은 이유도 세 번째 시집과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서였어요.

내면에서 끊임없이 아우성치는 목소리들, 미친 목소리들, 다성의 목소리들. 앞서도 얘기했듯이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홀로 설 수는 없지만 어떤 문맥 속에서는 한 줄의 문장이 또 그 자체로 완벽할 수 있거든요. 한 줄 한 줄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시이고 그 자체로 완전하지만, 그런 목소리들을 병렬식으로 늘어놓았을 때 생기는 어떤 효과들이 있을 거예요. 비슷한 구조의 단문들을 반복적으로 나열함으로써 그 문장들은 또 다른 문장들과 교환 가능하고 삭제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겠지만 또 그런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구조적인 면에서나 의미를 드러내는 면에서나 어떤 문맥 속에서 대체 불가능한 문장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하게도 되거든요. 아무튼 그런 목소리들을 문장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검열하지 않고 그런 목소리들을 마구마구 풀어 놓는 중이에요. 언어는 정신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니까, 정신착란 상태에 있는 사람의 언어는 착란의 언어 그 자체일 것이고요. 지금은 그렇게 뭔가 해체적인 시, 호응 관계도 없고,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문장들을 쓰고 있다 보니 정신적 해방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아무튼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들이 동시에 다발적으로 쏟아져 내리기를 바라고 있는데, 또 시도라는 것이 어떤 형식 자체를 깨기 위한 형식은 아니구요. 그저 거칠 것 없이 나아가 보려고 합니다. 시를 써나가는 데 있어서 자유롭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써나가면서 지금 내가 너무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한데. 모르겠어요. 지금은 그것을 써야 한다는 생각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 이영주 : 미친 목소리가 막 나온다는 거죠?   

▶ 이제니 : 네. 일종의 받아쓰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 이영주 : 받아쓴다고 말씀하셨는데, 이따금 시인은 영매사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내면에 무엇이 올라오면, 그런 말들을 받아내는 존재가 되죠. 오늘 이제니 시인의 옷도 새카맣잖아요. 흑마녀, 보헤미안의 이미지가 있어요. (일동 웃음)   

▶ 이영주 : 그럼 지금부터는 독자 분들에게 기회를 드릴게요. 평소 이제니 시인에게 궁금하셨던 점, 질문해 주세요.   

▶독자 질문 : 아까 「모르는 사람 모르게」라는 시를 읽으실 때 시에 없는 구절을 즉석에서 추가해서 읽으셨잖아요. 동일한 구문에 단어를 바꾸는 형식으로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 이제니 : 사실 그 시는 더 짧아져도 좋고 더 길어져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낭독을 할 때면 그때그때마다 그렇게 구절을 지어내서 덧붙여 읽곤 하는데, 그런 비슷한 구조의 단문들의 반복을 통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어떤 말의 ‘뜻’이기보다는, 어떤 리듬, 감정적인 질감 같은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말해 보고 싶었어요. 시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그런 말의 질감이 더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이기도 하구요.   

▶독자 질문 : 아까 인터뷰하실 때 이제니 시인께서는 언어 자체를 무척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이제니 시인이 생각하시기에 언어를 참 매력적으로 다룬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나요?   

▶ 이제니 : 국내외를 막론하고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습니다. 한국 시단도 좋은 시집이 계속 계속 출간되고 있구요. 시집이 나오면 서로 주고받기도 해서 챙겨서 읽게 됩니다. 소설을 오래 습작해 왔기 때문에 시는 습작기가 따로 없었다고 얘길 해왔었지만, 사실 습작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애독자로서 시를 읽고 쓰고 하는 걸 무척이나 좋아했으니까. 사실상 중고등학교 때부터 필사를 해왔다고 할 수도 있겠죠. ​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줄곧 학교 문예부에 들었는데, 자주 수업을 빼먹으면서 백일장에 나가서 시도 쓰고 수필도 쓰고 그랬어요. 그야말로 문학소녀라고 할 만한 시기를 보냈던 것 같아요. 당시 제가 돈을 주고 산 시집들 중에서 보들레르의 산문 시집 『파리의 우울』과 함께 오규원 시인의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가 있었는데요. 선언이나 광고 문안 그 자체가 시이기도 하고, 당시 아주 모던하고 실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시집을 만났다는 것이 제게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시절 그 시집을 꽤 오랫동안 어디든지 들고 다니면서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독자 질문 : 그럼 시도 손으로 쓰시나요?  

▶ 이제니 : 네. 소설을 쓸 때와는 또 다르게, 시는 맨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종이에다 연필로 썼고, 지금도 여전히 손으로 쓰고 있습니다. 마무리 단계쯤에서 종이에 출력을 하고 검토를 하는 정도로. 요즘에는 워드 프로그램의 글씨체가 좋아서 처음부터 워드로 작업을 하면 허술한 문장도 아주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함정이 있거든요.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처음부터 컴퓨터 모니터를 보고 앉아 시를 쓰려고 하면 좀 멍해지면서 잘 써지지가 않습니다.  

▶ 이영주 : 이제니 시인은 글씨를 정말 잘 쓰시잖아요. 나중에 작가 집필 원고로 전시되면 정말 예쁠 것 같아요. 다른 질문 없나요?   

▶독자 질문 : 시와는 상관없는 질문이라 부끄러운데요. 제 인생의 주제는 ‘건강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제니 시인을 실제로 뵈니까 건강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아픈 시기도 있었지만, 정신의 건강함으로 인해 금세 회복이 되신 것 같아요. 건강한 삶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궁금합니다.   

▶ 이제니 : 저는 몸을 움직이는 걸 좋아해요. 중고등학교 때도 체력장을 하면 매번 특급을 받을 정도로 걷기, 달리기는 물론이고 이런저런 운동을 좋아했어요. 그래서인지 시인이 안 됐다면 춤추는 사람이 됐을 것도 같아요. (웃음) 이십대 초반에 현대 무용가인 홍신자의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기억도 있고. 자기 안의 것들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어떤 제의적인 몸짓을 통해 다른 이들과 마음의 바닥 저 깊은 곳에서 교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저에게 있어 몸을 움직이는 것이 그렇게 소중한 일이다 보니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전신마비 상태로 지내는 동안,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상황을 극복해 나가 보라는 과제가 주어진 듯한 느낌 같은 것도 있었구요. 글 쓰는 방식도 사고 이전까지는 며칠씩 밤을 새면서 자주 한꺼번에 몰아서 쓰곤 했는데, 사고 이후로는 글을 쓰면서 중간중간 쉬어야 해서 글쓰기의 리듬도 깨지고, 그러다 보니 말할 수 없는 좌절감, 분노 같은 것들이 오래 지속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오래전부터 영성에 관한 관심도 많았고, 몸과 마음이 움직이는 자리를 살피는 것에 익숙하다 보니, 어느 순간 그 시기를 잘 건너온 것 같아요. 지금도 명상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지는 편이구요. 매일매일 일기를 쓰는 것도 도움이 되구요. 무엇보다도 지금의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지 간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것,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을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이게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요. (웃음)  

▶독자 질문 : 시를 읽다 보니 ‘있다’라는 술어가 굉장히 많이 나오더라고요. ‘있다’라는 시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이제니 : 깊이 읽어 주셨다는 생각이 드네요. ‘있다’라는 것은 ‘있다’라고 말할 수 없는, 그러나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사라져 가는 현재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있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미 사라지고 없지만, 그럼에도 ‘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어떤 순간이 분명히 있잖아요. ‘있다’라는 말은 실은 직전의 어떤 사태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거겠지요. 1초 전, 1초 전으로 밀려나 버리는 순간들을. 그리고 제게는 ‘있다’라는 그 술어 역시 시집에 숱하게 나오는 나무, 구름, 바람과 같은 단어들의 값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이기도 하구요. 수사 혹은 술어로 작용한다기보다는 그저 그 말로써 존재하는 말 그 자체. 그렇게 ‘있다 있다 있다’라고 몇 번이나 강조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을 해도 잡을 수 없는 어떤 흐릿한 시간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자 질문 : 「아마도 아프리카」라는 시는 노래로도 만드셨다고 알고 있어요. 시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을 요즘도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 이제니 : 네, 요즘도 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스무 곡 넘게 만들었는데요. 친구들은 그 노래가 그 노래 같다고 그러지만, 또 곡들이 단순한 것이, 중독성도 꽤 있는 편입니다. (일동 웃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글쓰기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느끼면서, 생각날 때마다 한두 곡 만들고, 또 생각날 때마다 또 한두 곡 부르고 그럽니다.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작품 중에서도 서너 곡 노래로 만들었는데요. 「너의 이마 위로 흐르는 빛이」 같은 시는 노래로 먼저 만들어졌다가 나중에 시로 씌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오창은 문학평론가 : 이제니 시인의 시를 보면 반복을 통해 움직임을 만들어 가고, 그 반복을 통해 명확성을 뒤흔드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반복이 만드는 리듬을 통해 정신적인 열림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요. 이러한 세계가 세 번째 시집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궁금합니다.   

▶ 이제니 :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기분으로 시를 써내려가고 있는데요. 완전히 해체된 무언가를 쓰고 있고 또 쓰려고 하고 있는데, 동시다발적으로 울리는 그 목소리들을 받아 적기 위해서는 저 역시도 착란 상태에 있어야 하니 괴롭기도 하고 외롭기도 합니다. 이런 목소리들을 써나가면서 왜 이런 목소리들을 써내려가는지, 써내려갈 수밖에 없는지, 계속해서 저 자신에게 묻고, 그 어떤 근원을 밝혀 나가게 되겠지요. ​

​자기만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어떤 일관된 톤을 만들어내는 과정 혹은 구조 속에서 언어로써 밀고 나갈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말들의 움직임과 함께 계속해서 걸어 나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좀 더 나은 차원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는 힘들지만, 그리고 어떤 기준이나 목적을 정해 두고 싶지도 않구요. 어쨌든 지금은 희미하게나마 희미한 그곳에 도달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그렇게 모인 문장들이 꼭 시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아도 좋을 것 같구요. 아무튼 지금은 그저 그 목소리들이 모이는 지점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친한 친구들과는 ‘점점 더 망해 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웃음)   

▶ 이영주 : 우리는 어떻게 하면 더 망가질까 고민하는 존재들이니까요. (웃음)   

▶ 이제니 : 이게 참 미묘한 지점이기도 해서. 정말 잘 망쳐야 하는데 그 경계를 잘못 넘나들면 정말 망하는 거죠. 뭐 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요. (웃음)   

▶ 이영주 : 이제 정말 마지막 질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들께 한 말씀 해주세요.   

▶ 이제니 : 멀리서 시간을 들여서 오신 분들도 계시고, 그래서인지 뭔가 얼굴과 얼굴로 만나는 자리라고 생각해서인지 많은 이야기를 한 것도 같습니다. 이런 말들은 그저 잠정적인 시론일 뿐이고 다 불필요한 말들이기도 한데. 그러나 오늘처럼 이렇게 가끔씩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늘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일에 쓴 시가, 아니, 오늘 쓴 시가 가장 좋은 것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 하지만 어디까지 얼마나 걸어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쓰려는 시들이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고,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요. 그렇게 계속 계속 걸어갈 때 오늘의 이 눈빛과 표정들이 문득문득 저에게 응원의 목소리가 되어 줄 것 같습니다. 될 수 있는 한 멀리 보면서 그러나 가까운 것들을 놓치지 않으면서, 오늘 쓸 수 있는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써나가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

*

그날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이제니 시인의 말투에는 묘한 중독성이 있어서, 맥주 타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시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계속 맴돌더군요.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조금씩 계속, 이라고 말하지 않고 조금씩 조금씩, 계속 계속이라고 거듭 말하는 것.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끝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의지와 눈빛과 표정들. 그 리듬이 주는 믿음으로부터 깊이 위로받았던 시간. 앞으로도 「모르는 사람 모르게」 아름다운 빛으로 가득한 시를 써주시기를, 기대하며 응원하겠습니다.

지난 2년간 독자 여러분을 찾아갔던 《문장 웹진》 공개인터뷰 [나는 왜] 행사는 오늘로 끝입니다. 다수의 독자 사이에서 멀리 거리 두고 앉는 낭독회나 강연회가 아닌, 내밀한 대화의 자리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마련했던 행사였는데, 어떠셨는지요. ‘끝’이라는 말은 아쉽지만, 오늘만큼은 ‘끝’이라는 말을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로 바꿔 부르고 싶습니다. 그 언제든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그러니 모두들 건강한 겨울 나시길 바랍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우리는 다시 만나야 하니까요.

2015.12.08 머리에 꽃을
          


빛으로 차오르는 물음을 닫고
이제니  

빛으로 차오르는 물음을 연다. 휘파람을 불며 나아간다. 뿌리 없는 풀과 같이 흐른다. 복합적인 성격을 펼친다. 미묘한 색감의 차이에서 오는 효과를 흩뿌린다. 어두운 경우가 발생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행운을 잡을 수도 있었습니다. 시공연속체로서의 새로운 차원이 열린다. 바닥을 향하는 서늘함이 있다. 투명하고 빈 공간이 있는 하얀 색이다. 죽음 직전의 명징한 정신이 있다. 죽음 이후의 눈꺼풀 속 어둠이 있다. 가슴에 새긴 낱말을 뒤섞는다. 주먹을 쥔 손은 비어 있다. 지켜내려는 영역이 있습니다. 능선을 빗기고 돌아서 기회를 엿본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예민한 손끝에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빛을 따라가려고 할수록 어두워질 뿐이다. 페이지를 넘기면 이미 그어진 밑줄이 있다. 내일의 구조를 수정하듯 어제의 문장을 언급한다.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나무를 보면서 숲은 보지 못합니다. 어둡고 아득한 것을 빛이라고 부른다. 수학적인 온기를 불어 넣는다. 단단하고 광채가 나는 열매를 손에 쥔다. 계절이 바뀌는 순서대로 떨어지는 도형이 있다. 순서를 기다려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간다. 이마에는 한 줄기 흰 빛이 새겨져 있다. 중심 없는 중심을 알리는 마지막 은유일 수도 있습니다. 기운을 상승시키기 위해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준다. 수납공간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흑백의 기호가 내일의 얼룩으로 선택된다.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기억을 극적으로 구성한다. 손금은 점점 흐릿해져간다. 크고 작은 목소리들이 평면 위에서 속삭인다. 당신이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으로 빛나야 할 장소를 물색한다. 다음 시간을 기대해주십시오. 익숙한 경구처럼 맴도는 문장을 내뱉는다. 사선으로 가로지르며 내려앉는 빛이 있다. 어둠으로 다시 차오르는 물음을 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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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처럼 나아가는 물결로
이제니  
이제니  

지속적으로 흔적을 남기는 움직임이 있다. 완고한 완만함으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다. 땅속 깊숙이 뿌리에서 뿌리로 이어진다. 마음을 불어 넣어 사람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멀리서 보면 회전하는 도형처럼 보입니다. 미묘한 울림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골라낸다. 손바닥을 외부로 향하게 한다. 미래를 건너가는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입니다. 민들레의 갓털이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공기가 들어가 있어 푹신푹신합니다.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몸짓으로 표현하려는 그림자가 있다. 색약의 빛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수직선과 수평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긴장이 있다. 정지된 채로 확산되는 무한함이 있다. 도취되어 진행되는 조형적인 요소가 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부터 다시 시작한다. 물질계를 떠나 영혼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동심원과 동심원이 만나는 경계에서 흐려지는 곡선을 본다. 응결된 빛이 흩어지고 있다.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연출한다. 물결의 깊이는 무한히 갱신된다. 순도 높은 파장을 증류한다. 망막에 맺히는 흔들림이 있다.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는 것이 좋을까요. 갓털은 씨를 매달고 여러 곳으로 흩어집니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환한 두 손처럼 매달려 있습니다. 먼지를 뒤집어 쓴 채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빈 칸을 채우십시오. 검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나아갑니다. 반짝이는 것들은 어둠 직전과 어둠 직후를 품고 있다. 부탁을 받고 위하는 마음이 같이 움직인다. 무수한 점들 속에 숨겨진 무수한 선들을 만난다. 내면에서 진실을 찾으려는 마음을 건넨다. 내적인 생명을 반복하는 울림을 전한다. 나뭇가지처럼 나아가는 물결이 있다.​

- 문예연구 2015년 가을호

2015.12.02 머리에 꽃을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이 우리를 이끌었고
이제니

보이지 않는 선을 긋는다. 공허를 채우는 잔향을 따라간다. 끝없이 반복되는 잔상이 있다. 아름다운 것들을 회수하여 보관한다. 거울을 마주 보고 정면을 응시한다. 바닥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있다.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합니다.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부르면서 희미하게 나아갑니다. 시간은 소리 없이 나이테에 새겨진다. 그림자 위에 또 다른 그림자를 덧씌운다. 기쁨보다 선명한 슬픔이 있다. 사람은 모두 내면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언제든 선을 넘을 준비가 되어 있다. 흔들리는 피사체들이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몸을 일으켜 세운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진다. 빛 없이 죽어 있는 얼굴이 도처에 가득하다.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이 빛은 무엇인가. 꿈꾸던 얼굴을 갖고 싶어 거짓말의 형식을 차용한다.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묻고 무엇을 춤춥니까. 그림자는 빛의 농도에 의해 질감과 명암을 달리한다. 숨겨두었던 말을 꺼낸 이유는 경계선을 건너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신경증을 다스리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했던 방어기제를 밝혀낸다. 당신의 내면은 열려 있습니까 닫혀 있습니까. 타인의 좋은 패를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읽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지 묻고 있는 것은 오래전 꽃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신을 울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떨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을 달리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백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가능성으로 무한히 출렁입니다. 왜 그 자리 그대로 남아 있습니까. 요구 받은 대답을 다듬어 질문으로 돌려준다. 목소리와 목소리 사이의 간극은 무감했던 날들을 반추한다. 과장된 음역을 흡수해서 균형감 있게 배치한다. 왜곡을 발생시키는 요소를 삭제한다. 별들이 빛납니다. 구름이 흐릅니다. 바람이 흩날립니다. 때로는 개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자신을 태우면서 빛을 내는 것이 있다. 순간순간 기억을 흘려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순간순간 슬픔이 지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심코 열어보는 서랍이 있다. 버리고 싶은 오래된 습관이 있다. 사람은 어떻게 완성되어 가는가. 시간은 어떻게 두려움을 조작하는가. 남들과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에 어떤 즐거움이 있습니까. 누구도 아무도 어디로 가라고 일러주지 않습니다. 고유한 목소리를 되찾아야 합니다. 존재하는 것들의 다양한 형태와 질감에 다가가야 합니다. 분산하고 발산하는 빛을 상상 속에서 재현한다. 더 깊은 그림자 속으로 가라앉아도 좋습니다. 더 깊은 어둠 속에서 더 깊은 바닥으로 헤매어도 좋습니다. 죽어가는 방식으로 피어나는 꽃을 건네준다. 잠재된 감정의 잠정적인 속삭임을 주시한다. 떠오르기를 기다려 만나게 되는 장면은 오래전 어머니의 뒷모습이다. 한 발 한 발 하루하루씩 살아가라고 말하며 응답을 기다리는 내면의 목소리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을 축복하기로 합니다. 시간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들의 역사는 회고의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상의 그림자로부터 대상을 분리한다.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 떠맡은 역할로부터 벗어난다. 무관한 단어들 속에서 사물의 이름과 존재의 환영이 자리를 뒤바꾼다. 자리 없는 마음 대신 피어 있는 꽃을 만진다. 낯선 목소리 사이로 피어나는 얼굴이 있다. 어둠의 경계 너머로 스며드는 기억이 있다. 가볍지만 쉽게 찢어지지 않고 복원력이 뛰어납니다. 닫혀 있던 선분이 열리고 있다. 경계 없는 목소리로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기에 있습니까. 안개 속을 걸어가면 밤의 한가운데에 도착합니다. 모르는 것을 어둠이라 부르면서 희미하게 나아갑니다. 제자리걸음이어도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 문장은 바닥으로 떨어졌고 마지막 문장은 날개로 펼쳐진다. 미래를 두드리면서 과거를 만든다. 세계의 입구가 열리고 있다. 숨소리 뒤에 들려오는 아름다움이 있다.

- 민음 블로그_ 주문 제작시_ 2015년 8월

2015.12.01 머리에 꽃을
          

마른 풀

대추 생강차를 끓이고 있다. 무언가 끓는 소리. 향과 색. 사이사이 화양연화의 첼로 소리가 들려오고. 가을인가 하는 사이 겨울이 되었다. 지난 주에는 창원의 대안학교에서 낭독회가 있어서 나선 김에 창원으로 김해로 부산으로 두루두루 다녀왔다. 11월에 첫눈을 만나기란 남쪽에서는 드물고 드문 일인데. 부산에서 거제도로 오는 차 안에서 흩날리는 흰눈을 보았고. 눈은. 흰눈은. 달리는 차창으로. 사선을 그으며. 빠르게 다가왔다 사라졌다. 순간 어딘가 멀리 와 있는 기분이 들었고. 기시감 속에서 잠이 들었고. 깨어나 보니 대추 생강차를 끓이고 있습니다. 사이사이 In The Mood For Love의 테마송이 흐르고. 어딘가에 갔다 온 사이 누군가가 캄보디아로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친분은 없지만 그렇다고 그저 안다고만 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뭔가 넘치는. 캄보디아에는 앙코르와트 사원이 있는데. 한 남자는 앙코르와트 사원의 벽 한구석의 작은 구멍에다 대고. 말하지 못한 어떤 말을. 말할 수 없는 어떤 말을.

대안학교에서 만났던 아이들과 그 시간에 대해서는. 무언가 마음을 찌르는 것이 있어 말을 하기가 쉽지 않고. 언제고 언젠가 잠들기 전의 일기에 쓰게 되겠지.

아무려나.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한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어떤 말 위에 덮어둔 몇 겹의 마른 풀을 만져보는 밤이다.


말라가고 있는 풀은 녹색의 향이 남아 있는데
바싹 말라 부서져내리는 풀은 재의 맛이 나고
바닥으로 떨어져 어두운 흙과 분별없이 섞여
언제고 언제고 언제나 언제나 나무로 돌아가려고

2015.11.30 머리에 꽃을
          

에니 그룹전_ 12th Floor 정기전

11월 20일 금요일, 에니 그룹전시 오프닝.

거제도, 섬달 갤러리.

2015.11.23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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