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죽은 개

몇 개의 낱말을 써 보고 자자.  

유리

나무

도로

무지

모자

자모

다리

미음

마음

소음

조음

격음

소격

나주

주역

역행

역양

양암

암석

암담

박제

벽제


나주엔 언제 가보나.
연꽃잎이 지기 전에 간다고 했는데.

죽은 개를 대신해 몇 개의 작은 인형을 샀었지. 개가 죽고 난 다음 날. 백화점에 갔다가. 박제된 듯한 손바닥만한 작은 동물 인형을 봤는데. 그 인형의 뻣뻣하고 가벼운 느낌이 죽은 개를 안았던 느낌과 너무나 닮아서. 섬뜩하고 서늘하고 서글픈 기분으로.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하고 있는데. 누구보다도 내 기분을 잘 아는 에니가. 하나 사줄까. 해서. 왠지 뽀삐한테 미안한 마음이 들어. 뽀삐 말고 다른 걸 마음에 들여선 안 될 것 같기에. 한편으론. 뽀삐도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 하는 생각에. 사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던 만큼이나 그 인형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이 바로 뽀삐였기에. 죽은 개를 다시 되찾는 기분으로. 개에게 잘 해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씼기 위해서. 하나 사줘. 하고 사들고 와서. 그런데 실은 사야 했고 사고 싶었던 것은 사온 인형이 아니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했던. 그 옆의 다리가 구부러진 인형이었는데. 개가 죽을 때 다리가 구부러진 채로 굳어 있었기 때문에. 인형을 사는 순간은 마음이 슬퍼 그것을 외면하고 싶은 생각이 컸기에. 다리 구부러진 걸 사와 보고 있으면 뽀삐가 영원히 다리가 구부러진 채로 저 세상에 있을 것만 같아. 결국 늠름하게 똑바로 서 있는 걸 사왔었는데. 사들고 오는 순간부터 이건 뭔가 아닌데 하며 기분이 더 울적해졌고. 집에 와서 사온 걸 보고 있자니. 가게 선반에 혼자 남겨져 있을 구부러진 인형 생각에 마음이 너무 아파서. 그러니까 전날 저녁 뽀삐를 묻고 왔는데. 또 한번 뽀삐를 버려두고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결국 다음 날 다시 가게에 가 다리 구부러진 개인지 사슴인지를 하나 더 사와서. 아무튼 그 두 개를. 아니 다리 구부러진 걸 책상 위에다 가만히 올려놓고 때때로 자주 쓰다듬어주면서. 그런데 개가 부쩍 상태가 나빠지기 시작한  작년 봄부터는 저도 나도 둘 다 상태가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각자 방치된 채로 쓸쓸하게 보냈던 날들이 많았었고. 그런 날들을 건너와 개가 죽어서인지 죽은 직후에는 너무 마음이 무거워서. 아무려나 다리 구부러진 인형을 사와. 그걸 나도 모르게 쓰다듬으면서. 잘 가라 잘 가라. 좋은 곳으로 가거라 좋은 곳으로 가거라. 미안했고 고마웠고 사랑했다. 하다 보니. 나름 위로가 되고 속죄를 받는 듯해서. 한동안 침대 옆 작은 책상에 두고 자주 만졌었는데. 어느 순간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고. 이전에 개와 좋았던 많은 날들이 새삼 떠올랐고. 죽어서 자유. 무한히 가벼워져서 좋아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보다는 하나하나 각각의 생명들은. 다 그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이 세상으로 와. 어떤 형태로든 서로의 곁에 그렇게 머물러 있다가. 또 어느 시기가 되면. 그렇게 이 생에서의 기운이 다하게 되면. 저도 나도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순리라는 생각을. 새삼 다시 하게 되었고.

그러니 나도 내 인생을 부지런히 열심히 그저 갈 뿐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인생을. 나는 나의 인생을. 그림자에 속지 않도록. 헛된 그림자에 반응하느라 시간 낭비 감정 낭비 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분별 없이. 아무 걸림 없이. 그렇게 순간 순간을 가면 된다는 것을. 그저 하루하루씩 살면 된다는 것을.

즐거울 수 있다면 더욱더 즐겁게 살면서. 이젠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이 없는. 중년의 나이. 낭비할 만큼 낭비했으니. 허튼 일들에 마음 뺏기는 일이 없도록. 보다 더 읽고 쓰고 공부하기에 집중하면서. 몇몇 좋은 사람들과 아름답고 즐거운 일들을 도모하면서. 보다 더 사랑하고 아끼면서. 그와 더불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배려한답시고 마음에도 없는 (줄 몰랐던) 친절을 베푸느라 시간 낭비 감정 낭비하는 일 따위도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려나 소소한 아름다움과 유머를 잃지 않으면서 하루하루를 밝혀 나갈 것이며.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마음이 많이 편안해져. 이제는 울지 않고 개를 생각하게 되었고.
우리는 모두 훌륭한 영혼들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그런 저런 생각들을 하는 무더운 여름 밤이다.
오늘은 어째 개구리 소리도 귀뚜라미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침 일찍 일어나 교회를 가야 하기 때문에.
오늘은 일단 이쯤에서 자도록 해보자.

코오ㅡ

2013.08.04 머리에 꽃을


          

오래전 목련

오래된 공책을 열었다가 오래전 목련잎을 발견했다.


무슨 말인가 쓰려다 그만 둔다.



2013.06.20 머리에 꽃을
          

책의 이웃

이사를 한 지 열흘이 넘었다. 이사 전에 책들을 좀 더 묶어두었어야 했는데. 마감이 겹친데다 옮길 집 리모델링으로 여기저기 쫓아다니다 보니 미처 챙기지를 못해. 책장에 그대로 꽂아둔 책들은 옮겨오면서 완전히 뒤죽박죽이 돼 버렸다. 이를테면 누보 로망 곁에 오늘의 요리백과가, 오늘의 요리백과 곁에는 프로이트 전집이, 프로이트 전집 곁에는 김종삼 전집이, 김종삼 전집 곁에는 세계 만물 그림사전이, 세계 만물 그림사전 곁에는 괴델, 에셔, 바흐가, 그 곁에는 존 러스킨의 드로잉이, 존 러스킨의 드로잉 곁에는 코란이, 코란 곁에는 우울과 몽상 에드거 앨런 포 소설전집이, 포 곁에는 The Left 1848-2000 미완의 기획, 유럽 좌파의 역사가, 그 곁에는 논어가, 그 곁에는 중용이, 중용 곁에는 영랑을 만나다 김영랑 시 전편 해설 시집이 놓여 있는 식이다. 따져 보자면 서로간에 친연성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비슷비슷한 제 곁의 친구들을 떠나 멀리 떨어져 있던 새로운 이웃을 사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으나.  

멍하니 어둠 속에 서서 한참을 아무렇게나 꽂힌 책의 등짝을 바라보고 있자니 뭔가 모를 쓸쓸함이. 그래봤자 별 수 없다는 어떤 허망함이. 아무려나 그 모든 책들이 제 곁에 있던 아름다운 친구들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친구는 좋은 것.

다 엎고 처음부터 다시 꽂아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눈앞의 마감이 무겁고.

어여어여 끝내놓고 책의 친구들을 나란히 두자. 그 비슷한 결을 서로의 곁에 다시 놓아두자. 서로가 서로에게 경계 없이 스며들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의 목소리에 다시 귀기울 수 있도록. 다시금 서로가 서로를 도저하게 넓혀갈 수 있도록. 그리하여 다시 깊고 넓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2013.05.11 머리에 꽃을
          


피로와 파도와 pirowapadowa
피로와 파도와 (2011, 3min 18sec) pirowapadowa

+
- original text: poem "pirowapadowa 피로와 파도와" from "amado africa 아마도 아프리카" by Lee Jenny 이제니,
Changbi Publishers changbi.com 창비, 2010
- original sound: "Tengu et Kitsune II 天狗と狐2" by Taku Sugimoto 杉本拓 & Taku Unami 宇波拓,
2009 (more info: japanimprov.com/indies/slub/tengukitsune2.html)

++
- recorded & edited by orolo 오롤로
- recorded on December 17, 2010, at Gunsan 군산, South Korea

2013.03.11 머리에 꽃을
          


Atoms For Peace
Ingenue

2013.03.11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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