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대수를 처음 만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한대수는 낡고 후진 기타 교습소의 낡고 오래된 통기타 선곡 500곡집 속에서 불쑥, 난데없이, 조금은 무감하게, 그러나 어떤 필연으로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그때의 한대수는 '그저' 한대수였다. 나무나 책, 연필이나 운동화 같이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보통 명사들 중의 하나였다. 그런 한대수가 고유 명사인, 한, 대, 수, 가 된 것은 몇 년 뒤였다.

그리고, 지금은..., 지금은 '그냥', 한대수이다. 내가 멀어졌는지 한대수가 멀어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하여튼 지금은, 한때 열광하던 것들의 끝이 그러하듯, 우리는 아주 중립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 아주 편안하고, 가끔씩만 생각난다.

오늘은 흐리고, 비가 오고, 그리고, 내 이마엔 약간의 미열이 남아 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떠벌리기엔 적당한 때가 아니다.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떠벌리기엔 조금 위험한 때이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어떠한 형용사도 적확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것들 앞에선 늘 말수가 줄어든다. 머뭇거리게 되고, 조심스러워지고, 호흡이 느려진다.

2005.01.17 머리에 꽃을






나는 반 고흐와 이야기했다.
한대수

나는 어젯밤 반 고흐와 이야기했다
그는 아직도 귀가 아프다면서
테오가 그의 모든 그림을 태워 버렸냐고 물었다
나는 그의 초상화들은
쇼핑백 위에 찍혔으며
해바라기는 이천이백만 불에
소더비에서 경매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어젯밤 고갱과 이야기했다
그는 위통은 여전하다면서
타히티는 어떠냐고 물었다
나는 타히티는 사라졌다고 말한 후
그에게 감사하다고 했다
그때 본 연보라색을
남겨준 것을

나는 어젯밤 니체와 이야기했다
그는 하느님이 흠씬
두들겨 팼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맞을 만한 짓을 했냐고 물었다
그는 "나는 잘못한 거 없어" 라고 말했다

나는 어젯밤 루드비히와 이야기했다
그는 9번 교향곡 이후에 아무 것도 만들지 못했음을
후회한다고 했다
나는 그를 진정시킨 후 말했다
"우리는 9번 이후는 감당할 수 없었을 거야"

나는 어젯밤 엄마와 이야기했다
엄마는 어서 자라고 하셨다

ㅡ 한대수 사진 시집 [침묵] 中에서
          

바람을 따라 걸었네
carpe aeternitatem!

2005.01.16 머리에 꽃을
          

Fukuoka, Japan. June 2002
photo by mangrove

텐진 코어를 어슬렁거리다가 어둑어둑해질 무렵
발자국으로 더러워진 보도블럭 위에서 만난 거리의 뮤지션.

몇 달 째 감지 않았다는 덕지덕지한 노란 머리,
쓰윽쓰윽 지판 위를 옮겨다니며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 노란 잠수함의 기타 코드를 짚던 검은 손톱.

둘이서 주거니 받거니 몇 곡씩 돌아가며 노래 부를 때,
파리떼처럼 왱왱거리며 주위를 맴돌던 자전거 니뽄 소년들.

2002년 여름은 함성과 열망이 가득했던 월드컵의 해였지만,
내게는 무한한 슬픔 속에서 치뤄진 장례식의 나날로 기록되고 말았다.

2005.01.15 머리에 꽃을
          
94년, 유앤미블루(U&ME BLUE)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과 비교할 순 없지만 MOT의 발견은 아무래도 가슴 뛰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작년 여름 나는, 무더운 아파트촌의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계단에 앉아 MOT의 앨범을 반복 반복 들으면서 무엇인가(혹은 누구인가)를 기다렸고, 앨범에 실린 그 모든 가사들이 비극적 lyricism의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그 우울하고 자폐적이며 자학적인 문학적 수사들에 대해 감탄을 하다가..., '그러나 불확실성은 더욱더'를 듣고는, 비슬라바 심보르스카의 어떤 시의 한 구절인, "확실성은 아름답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훨씬 더 아름답다.' 에서 제목을 가져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 아닌 의심을 했고, 그런 저런 허튼 생각들을 하는 동안에도 기다리던 무엇인가(혹은 누구인가)는 오지 않았고, 좀 더 시간이 지나자 기다리던 그 무엇인가(혹은 누구인가)가 오질 않길 바랐고, 더 이상 내 자신이 기다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랐다. 너무 더운 나머지 나는 연신 땀을 흘렸고, 그때 기다리던 무엇인가(혹은 누구인가)가 왔고, 설마 우는 거냐고 놀라며 물었고.

그럴 리가. 나는 울지 않아.

유난히 바람이 불지 않던 그 여름엔 시간은 정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MOT의 위안이 아니었더라면 조금은 더 괴로웠을 나날이었고.

2005.01.12 머리에 꽃을







카페인 ㅡ MOT

그 자리에 앉아 낙서를 했지
종이 위에 순서 없이 흘린 말들이
네가 되는 것을 보았지. 네가 되는 것을 보았지.

난 숨을 참아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또 손목을 짚어도 내 심장은 무심히
카페인을 흘리우고 있었지. 카페인을 흘리우고 있었지.

늘 깨어 있고만 싶어. 모든 중력을 다 거슬러.
날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많은 허전함을 내게.

하루는 그리 길지도 않고 지루하다 할 것도 없는데.
난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는데. 난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는데.
          
그는 자신의 인생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자네도 그렇게 생각하나?" 그가 물었다.
"뭘 말인가?" 내가 되물었다.
"아닐세." 그는 고개를 두어 번 흔들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렇게 하는 게 틀림없나?" 그가 물었다.
"뭘 말인가?" 내가 되물었다.
"아닐세. 자네에게 대답을 구하려고 했던 게 아닐세. 신경쓰지 말게."
그의 얼굴은 몹시 우울해보였다.

"자네, 알고 있나? 점점 이상해지고 있다는 사실 말일세." 내가 말했다.
"지금 나를 두고 하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는 천천히 나를 돌아다보았다.

나를 돌아보는 그 찰나가 백 년은 족히 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 있다면 궁극에 가까운 시간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나는 두 눈을 비볐다.

"관두세. 이런 대화는." 그가 말했다.
"그러기로 하지." 내가 말했다.

조금 추웠고 배가 고팠다.
우리는 벌써 십구일 째 공원의 세 번째 벤치에 앉아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는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2005.01.10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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