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n't Tell Your Mother

2015.04.07 머리에 꽃을
          


푸른 물이다

풀이 나고 자라는 푸른 들판 속에 어리고 붉은 벌레가 숨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개암나무 가지의 검은 구멍 속으로 끊이지 않는 노래를 들이부었다. 말할 수 없는 말로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지평선은 거울의 저쪽에 있었다. 태양의 반사경을 머리 위에 두었다. 뜨거움이 심장까지 곧장 내려왔다. 울음이 오면 꽃잎도 따라 왔다. 모래와도 같은 기억이 흩어졌다. 푸른 들판 너머에는 푸른 물이 있었다. 푸른 물이 있다라고 쓰면 푸른 물이 눈앞에 펼쳐질 것처럼. 푸른 물 아래에는 보이지 않는 구름이 있었다. 간신히 말할 수밖에 없는 한 숨결이 있었다. 교회 종탑 너머로 한줄기 빛이 날아와 아프게 나를 찔렀다. 눈은 부시고 빛은 어둠이고 나는 잠깐 죽었다. 다시 살아나면 그 곁에 푸른 들판이 있었다. 푸른 들판 너머로 다시 푸른 물이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얼굴을 씻었다. 거울의 저쪽은 거울의 이쪽과는 무관하게 빛나고 있었다. 거울의 이쪽은 거울의 저쪽과는 무관하게 열리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 안과 밖이 생겨나고. 안과 밖과는 무관하게 자꾸만 열리는 것은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미지의. 미래의. 공백의. 방백의. 다시 돌아오는. 다시 속삭이는. 어제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제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의지와 무관하게 의자에 앉아 있었다. 떠난 사람 곁으로 떠나려는 물결이 있었다. 푸른 물을 바라보며 자꾸만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너무 울어 남아 있지 않는 눈물로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풀어질 수 없는 마음이 있었다. 잊지 못하는 빛이 있었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까.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니까.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될 수 있으면 천천히 오래오래 기다리기로 하고. 푸른 물이다 푸른 물이다. 잠들기 직전에는 죽은 사람이 쓴 책을 읽었다. 대화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내내 이어졌다. 푸른 물 아래에는 여전히 가슴을 두드리는 구름이 있었다. 춥고 느리게 나는 무릎을 꿇었다.

시와표현 2015년 4월호

2015.04.07 머리에 꽃을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라고 부르면 소년이 보인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움직인다. 세상 끝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갖지 못한. 꽃도 피어나는. 불도 피우는. 자신의 숨은 광기를 걱정하는. 웃어야 할 때 웃을 줄 모르고 울어야 할 때 울지 못했던. 시들어버린 얼굴 위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물러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발 물러나고 있었다. 비유를 잃어버린 이유에 대해서 생각했다. 마음이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어딘가를 바란 적이 없는데도 언제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와 있다. 도처에 도사린 어제의 구름. 물보다 묽은 오늘의 묵음. 들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으로.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무언가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는 두 손으로. 내가 살았던 곳에는 내가 없었다. 내가 사랑했던 것에는 네가 없었다. 소년은 소년에게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쓴다. 벗어나길 바라는 순간 벗어나고 싶은 울타리도 하나 생긴다라고 쓴다. 울타리 밖에서부터 기억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감함으로 무장한 날들이 흘러들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착란의 찬란의 소리 없는 소용돌이 속이다. 톱니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세계가 쉬지 않고 달려가는 그림자. 죽거나 늙거나 마지막은 마찬가지라면. 잊거나 믿거나 닿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천상의 음악이 흘러도 좋을 것이다. 낮게 낮게 나는 천사가 날개를 펼쳐도 좋을 것이다. 단단한 벽 너머로 창이 열려도 좋을 것이다. 손과 발로 박자를 맞추고 싶은 순간도 올 것이다. 다시 제대로 웃거나 다시 제대로 울 수 있는 장면도 있을 것이다. 어깨 위로 가만히 내려앉는 다정한 손도 있을 것이다. 어둠 없이 잠드는 밤도 있을 것이다. 서러움 없이 말하는 입도 있을 것이다. 소년은 중심으로 중심으로 가고 있었다. 중심은 더 더 깊어가고 있었다. 기어이 미래로 돌아갈 겁니다. 기어이 그곳에 도착할 겁니다. 대화는 쳇바퀴처럼 맴돈다. 꽃은 꿈으로 피었다 진다. 꿈은 망각으로 완성된다. 깊어지다 어두워지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것. 말할 수 없이 어두워지는 것은 깊어지는 것. 소년은 자라 소년이었던 소년이 된다. 소년이었던 소년의 오래된 미래가 된다. 어떤 소년에서 한 소년으로 돌아간다.

문학과사회 2015년 봄호

2015.04.07 머리에 꽃을
          


흑곰을 위한 문장

흑곰에 대해서 쓴다.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선 아무것도 쓸 수 없기 때문에.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이를테면 흑곰의 마음 같은 것. 마음을 대신하는 눈길 같은 것. 눈썹 끝에 맺혀 떨어지는 눈물 같은 것. 머나먼 북극권으로 사라지는 한 줄기 빛 같은 것. 한 줄기 빛으로 다시 시작되는 오래전 아침 같은 것. 산더미만 한 덩치에 보드랍고 거친 털옷을 입고 있습니다.

흑곰의 울음소리: 우우우우어어어워워워워어어오오오어-
흑곰의 노랫소리: 우우우워워워워워어어어어우우우어어-

흑곰의 일생에 대해 생각한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 문득 가까워지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생각하면 보이지 않던 속살이 보이기 때문에. 모음과 자음으로 꽉 찬 낱말처럼 무언가 가득 차 있는 것. 이를테면 용기와 믿음 같은 것. 후회와 반성 같은 것. 떨림음처럼 배 속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울음 같은 것. 바닥에서부터 터져 나오는 한숨 같은 것. 좀처럼 울리지 않는 종이 있을 것이고. 좀처럼 열리지 않는 창이 있을 것이고.

흑곰의 발자국 소리: 쿠웅웅 쿠우우웅 쿠으으우웅 쿠우웅-
흑곰의 춤추는 소리: 쿠우우 쿠우우웅 쿠우우웅 쿠우우웅-

흑곰의 겨울잠에 대해서 쓴다. 새끼를 낳는 어미를 본 적도 없이. 헤엄을 치고 나무를 오르는 여름도 없이. 열매나 견과류를 먹는 얼굴 없이도. 누군가의 마음속 검은 점처럼. 지워지지 않는 잔상을 바라보듯이.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어쩌면 내 마음 속에서 잠들어 있는. 꿈의 꿈속에서야 내게 흑곰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흑곰의 흑점. 흑점의 흑연. 흑연의 흐느낌으로. 그리하여 마지막은 기침이다. 기침으로 기척하는 아침이다. 아침으로 다시 시작되는 검은 몸이다. 검은 몸으로 흘러가는 검은 문장이다. 검은 문장으로 다시 열리는 검은 창이다.

문학과사회 2015년 봄호

2015.04.06 머리에 꽃을
          


어떤 나뭇가지들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지. 서로의 영혼을 더 잘 읽기 위해. 서로가 서로에게 더 좋은 기운을 주기 위해. 우리는 서로의 과거와 미래 사이를 오갔지.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우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고. 나에 대해. 너에 대해. 우리에 대해. 서로의 영혼을 들여다보며 보았던 그 모든 풍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지. 어디서 마주쳤는지 알 수 없는 얼굴들. 어디서 묻혀 왔는지 알 수 없는 먼지들. 기억과 망각. 입김과 고드름. 반복해서 읽어도 새로운 책. 낱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의 낱말 카드. 동사動詞보다는 명사名詞가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계절. 겨울 숲속의 말없는 산책. 고독 속의 고독. 고독 끝의 고독. 고독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안에 있는가, 밖에 있는가?* 여행 가방을 꾸리는 새벽의 피로. 이른 아침에 도착하는 낯선 기차역. 말할 수 없는 말들과 말해선 안 되는 말들. 대기실. 휴게실. 정류장. 정거장. 싸구려 호텔 로비나 야간열차의 식당 칸. 흡연 욕구로 가득한 공항의 흡연실. 불 꺼진 안내 데스크 위에 놓인 피로한 팔꿈치들. 나 혹은 당신이 무언가를 기다리거나 기다리지 않았던 바로 그 시간. 읽거나 읽지 않았던 어제의 책들과 함께. 당신 혹은 내가 조금은 부족하게 존재했던. 저곳과 그곳 사이의 그 모든 이곳들. 더 많은 입김을. 더 많은 입김을. 더 많은 얼음을. 더 많은 얼음을. 조각 낱말로 간신히 말하던 나날들. 비는 좀처럼 그칠 줄을 몰라 물고기 가면을 쓰고 걸었지. 흘러가는 물결과 물결 속에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남아 있지 않다고. 간신히 남아 있는 그림자를 바라보았을 때. 전신주 아래에는 새들이 놓쳐 버린 새 둥지 가지들이 떨어져 있었고.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무언가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아꼈었다는 것인가. 무언가를 아꼈었다는 것은 무언가를 사랑했었다는 것인가. 어떤 나뭇가지들은. 어떤 나뭇가지들은. 나무를 떠나도 죽지 않았고. 죽지 않은 기억은 죽지 않은 노래를 흥얼거렸고. 새들은 오늘 다시 날아오르며 노래한다. 팔랑거리는 작고 거대한 날개들. 이 어둠이 걷히면. 이 기억이 스러지면. 어제의 양떼구름을 잊어버렸듯 오늘의 나무둥치의 상처도 잊게 되겠지. 기쁠 것도 슬플 것도. 기억할 것도 잊어야 할 것도. 간직할 것도 버려야 할 것도. 얻어야 할 것도 구해야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먼지는 어둠 속에서 별처럼 반짝인다. 너에게는 아직도 잃어버려도 좋을 무언가가 남아 있었고. 어떤 나뭇가지들은. 어떤 나뭇가지들은. 나무에서 나무로 여전히 옮겨 다녔고. 어느 날 문득. 처음부터 흙이었다는 듯이. 마침내 땅으로 내려와 쉰다. 다시 천천히 눈을 감는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월간 에세이 2015년 4월호


2015.04.06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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