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 일기
이제니

‘나는 이제 가는 곳마다, 카페에서나, 거리에서나, 만나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결국에는 죽을 수밖에 없음이라는 시선으로, 그러니까 그들 모두를 죽어야 하는 존재들로 바라본다.
― 그런데 그 사실만큼이나 분명하게 나는 또한 알고 있다, 그들이 그 사실을 결코 알고 있지 못하다는 걸.’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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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는 롤랑 바르트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하며 써내려간 일기이다. 바르트는 어머니가 죽은 다음날부터 2년 동안 이 일기를 써내려갔다. 노트를 사등분해서 만든 쪽지 위에 잉크로, 때로는 연필로 써내려간 이 일기에서 바르트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슬픔을 특유의 시적인 단장의 형태로 집요할 정도로 절절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자신의 존재 그 자체이기도 한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는 것. 영영 되찾을 수 없다는 것.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약 없는 기약 속에서 끝없는 기다림이 시작된다는 것. 그의 죽음을 통해 자신 역시 언젠가는 죽으리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인지하게 되는 것. 그러나 그토록 흔한 죽음이, 우리 곁에 그토록 가까이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는 이 현재에만 집착하고 함몰되어 있는 탓에 정작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순간의 그 죽음의 사건은 예비되지 못한, 준비되지 못한, 불의의 사고로 맞아들이게 되곤 한다는 것. 다시는 되찾을 수 없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존재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무언가가 사라진 후에도 그 사라진 존재와 계속되는 사랑을, 그 영속적인 사랑을, 혼자서 묵묵히 견디면서 이어나가는 방법을 배운다. 그리하여 우리는 늘 조금 뒤늦은 방식으로, 없지만 있는 어떤 존재와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슬픈 기쁨을 알게 된다.

국립국어원 201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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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0.15 머리에 꽃을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
이제니

어둠 속에 놓여 있다. 푸른 모니터 빛. 나는 두 손을 가지고 있다. 심장과 머리. 내 앞엔 백지. 그리고 아직 말이 되지 못한 말들이 있다. 문장이 되지 못한 문장이 있다. 지금 이 순간. 어떤 충만함으로 가득한. 유년 시절의 어떤 느낌들을 닮은. 한동안 잊고 있었던. 거의 공백 상태에 가까운. 내 삶의 원형. 백지와도 같은. 최초의 경이로운 경험들. 한때는 있었으나 이제는 없는 것. 지금은 있으나 곧 사라질 것들. 유년 시절을 불러들이는 물결과 물결과 물결과 피로와 파도와 피로와 파도와. 별빛을 받아 부서질 듯 위태롭게 반짝이는 밤바다를 어두운 다락방 창틀에 턱을 괴고 앉아 몇 시간이고 몇 시간이고 바라보던 날들. 아홉살 무렵. 그때 바다는 창문 너머로 몸을 던져도 좋을 만치 가까이 있었지. 눈물과 허기와 졸음과 거울과 종이와 경탄과 그리움과 침묵 가까이. 몇년 뒤 다락방을 떠나기 전까지 그것은 내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고. 모든 것이 가능하게 느껴지던. 규칙 속의 무규칙 혹은 무규칙 속의 규칙적인 아름다운 배열들. 거침없는 도약과 반복적인 리듬의 변주 속에서 밀려갔다 밀려오는. 거대한. 끝이 없었던. 그야말로 무한성의 실체였던. 그런 바다를 곁에서 두고 보았던 것은 작은 축복이나 다름없었고. 그저 물결처럼. 그저 쓰기 위해 써내려가던. 그런 날들. 그 어떤 독자도 가지지 못했던. 그 어떤 독자도 바라지 않았던. 그렇게. 글쓰기 속에 완전히 침잠된 날들을 다시 불러들이며. 모든 새로운 것은 회상과 상상의 교집합 속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 어둠 속에서.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이 날들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간격을 허용하지 않듯 조밀하게 살아온 날들이 오래되었다. 벌써 몇 년. 이미 몇 년. 방은 어둡고 빗소리만이 가득하다. 단조로운 소리의 질감이 평면의 색깔로 변하는 순간, 음音에서 선線으로, 선線에서 면面으로 펼쳐지는 순간, 그렇게 어떤 공간이 발생하는 순간. 그러면 다만 거기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된다. 고요히. 떨어지는 폭포수 아래 앉아 있는 기분으로. 가고시마 현의 작은 섬. 야쿠 섬 깊은 숲속에는 수령 7200년 된 삼나무가 있다는데. 그 삼나무. 조몬스기를 보러 가고 싶은 그런 날이다. 나무든 바위든 돌이든 무엇이든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 정령이 깃드는 법. 가미かみ. 신. 정령. 참나. 깨달음은 의외로 쉬운데 망각 또한 쉬워서. 어쩌면 그 망각이 사람을 살게 하는지도.

책상에 앉아 옴이니 아움이니 하는 익숙한 만트라를 조용히 소리 내어본다. 옴 혹은 아움이라는 소리에는 어떤 알 수 없는 에너지가 실려 있다. 비 오는 밤의 창문 너머론 미류나무가 바람에 흔들린다. 미류라고 발음하면 휘파람이 불고 싶어진다. 쓸쓸하고 푸르고 환한 휘파람 소리.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서 해질 무렵 혼자 부르는 휘파람 소리. 어째서 미류라는 이름에는 휘파람 소리가 묻어 있는 걸까. 어떤 알 수 없는 단어가 떠오르고. 그 단어에서 어떤 알 수 없는 색깔을 보고. 알 수 없는 음을 듣고. 알 수 없는 사물을 떠올리는 일. 낯설고 한산한, 한산하고 낯선, 어두운 상점의 거리를 걸어가면서 그곳이 이미 오래전에 와봤던 곳이라는 사실을 불현듯 떠올리는 일.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하나를 떠올리려는, 되찾으려는 시도에서 오는 마음의 통증들. 잊어서는 안 되지만 잊어버린, 잃어버린, 어떤 소중한 기억을 찾아 헤매는 오랜 고통들. 나는 그 기억들 위에 언제나 약간은 크거나 약간은 작은 낱말들을 올려둔다. 언제나 제대로 된 낱말들을 제대로 얹지 못한다. 번번이 실패하고 틈틈이 실패한다. 이 현재는. 지금 이 순간은. 매번 다시 새로 씌어져야만 하기에. 그리하여 나는 계속해서 또다시 실패할 것이다.

지난 주말에는 해안가의 새로운 산책 코스를 발굴했다. 그러나 바다가 보이는 그 벤치에 앉아서야 그곳이 십년 전쯤 누군가와 같이 앉아 있었던 곳이라는 걸 기억해냈다. 우리는 그때 나란히 앉아 음악을 나누어 들었고. 무언가 어떤 말들을 주고받았고. 그리고 우리는 지금. 나는 지금.
오늘. 내게 중요한 것은 내 책상 위의 작고 검은 어떤 것들뿐이다. 혹은 내가 걸어다니는 집앞 길이라든가. 이끼가 낀 그늘진 골목 같은 것들. 떠돌이 개나 고양이가 왔다갔다 하는 풍경들.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리는 희미한 그림자 정도. 딱 그 정도의 작은 공간들. 그러나 그 작은 공간을 자꾸만 비집고 들어오는. 언젠가 내가 보았던. 내가 스치듯 보았던. 그러나 명료하게 보았던. 명료하게 알아차렸으나 모호하게 뒤섞이도록 내버려 두었던. 그렇게 일부러 잃어버렸던. 잊어버렸던. 너와 너와 너와 너의 어쩌지 못하는. 어쩔 수 없는. 그런 표정들이. 그런 표정들은. 왜 자꾸 나의 내부로 비집고 들어오는 건지. 그런 흔들림들이, 희미함들이, 연약함들이, 아득함들이, 흐느낌들이, 시리고 쓰린 마음들이, 이름 붙여보고 싶은 스쳐 지나침들이, 지금껏 이렇게 계속 뭔가를 쓰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렇게. 내 안의. 내 앞의. 작은 공간 속에서. 다만 조용히. 은밀한 즐거움을 느끼면서. 문득문득 스미는 듯한 슬픔을 느끼면서. 때때로 날아갈 듯한 허튼 충만함을 느끼면서. 그렇게 순간과 순간의 쓸쓸함을 흘려보내고 흘려보내면서. 읽고 쓰고 보고 듣고. 내 마음의 우주를, 그 깊은 우물을 들여다보고 싶을 뿐. 그저 그럴 뿐.

어느 결에 죽은 듯이 잠이 들었고. 얼마간의 잠. 얼마간의 잠 속의 얼마간의 꿈. 눈을 뜨니 새벽 네 시 반. 페이지를 넘긴다. ‘숭고함의 요소 중 가장 으뜸은 폐허이다. 그리고 이 폐허는 반짝이는 하이라이트와 짙고 어두운 그림자 사이의 비극적인 교차로 나타난다.’ 그리고 몇 개의 도판. 몇 페이지 건너 뛰어. ‘내가 던지는 것은 공기이고, 혹은 음파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도달합니다. 움직임을 가질 때 언어 또한 조각적입니다. 말을 할 때 입에서 일어나는 현상도 조각입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조각으로 보지 않지만, 공기가 움직이고 성대가 움직이며 구강이 운동을 합니다. 나에게는 생각도 조각입니다. 생각은 언어만이 아니라 쓰기도 포함합니다. 근본적으로 조각 자체보다는 하나의 조각이 발생하는 시점이 더 흥미로운 것입니다.’ 『미술사와 근현대』 속에 적힌 요셉 보이스의 언어에 대한 견해들. 또 다시 몇 페이지 건너 뛰어. 앞으로 혹은 뒤로. 그리고 또 다른 책으로. ‘기억은 과거를 현재 속으로 연장시킨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기억으로 가득 찬 우리의 지각이 과거를 응축시키는 정확한 비율로 미래를 처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받아들인 작용에 대해 그것의 리듬에 꼭 맞으면서 같은 지속으로 연속되는 직접적인 반작용으로 답하는 것,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바로 이것이 물질의 근본적인 법칙이다. 필연성이란 이 사실로 이루어진다.’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을 넘어. 그리고 다시 이리 저리 건너 뛰어 또 다른 책으로. 그리고 몇 페이지를 쓴다. 그리고 또 다른 책으로. 몇 페이지를 더 읽는다. 몇 페이지를 더 쓴다. 그 무엇도 읽지 않고 그 무엇도 쓰지 않는다. 종이 위에서 검은 벌레들이 기어간다. 그러다 작은 구멍 속으로. 작은 구멍 속의 구멍 속으로. 사라진다. 사라진다.

눈을 뜨기 몇 시간 전 수첩에 적은 문장은 이런 것들. ‘언어의 분출. 분출하기 위해. 아니, 분출을 지연시키기 위해. 멈추고 있다. 참고 있다. 삼키고 있다. 움켜쥐고 있다.’ 세 줄 건너뛰고. ‘낱말을 발명하는 사람의 입술 주름에 대해 생각하는 아침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생각해보기로 했는지 잊어버린 노파처럼. 노파의 그 입술 주름처럼. 내 입술 주름을 만져보기 위해. 영원과도 같은 시간 속을 비집고 손가락 하나를 천천히. 내 입술 주름 위로 가져가겠지요. 영원이 스쳐지나가는 순간을 목도하게 되는 그런 순간의. 어떤 간격. 접혀진. 시간 혹의 언어의. 미세한 주름들을 펼쳐보려는 그런 순간의. 그 순간의.’ 등등. 이런저런 메모가 적힌 시작 노트들. 작은 나뭇잎 조각과도 같은. 어쩌면 쓸모없는. 문장을 쓰자마자 잠들었고 이어지는 이런저런 짧은 꿈들. 벌레들. 벌레들. 또 벌레들. 벌레들이 나무에 열매로 매달려 웃고 있었고. 가까이 가서 보니 웃으면서 울고 있는 얼굴. 웃음과 울음의 입, 나는 그 미묘한 차이를 알고 있지, 라고 옆에 서 있던 마망에게 나는 말한다. 마망이라니. 엄마라는 단어와도 가까운 이 낱말은 또 어디에서부터 내게로 온 것인지. 모국어라는 말은, 모국어라는 단어는, 구어체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저 근원으로 이끄는. 저 근원 너머로 우리를 재촉하는 말이기에. 그리하여 어쩌면 역으로 모국어야말로 온전한 구어체의 세계에 속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며.

몇 달째 읽는 것들이라곤 禪에 관한 책들뿐. 이승훈 선생의 『아방가르드는 없다』, 『라캉 거꾸로 읽기』를 다시 펼쳐 읽는다. 글을 쓰고 쓰고 쓰다 보면 사람들은 결국 꽃을 본다. 사람들은 결국 空을 본다. 그 空이란 건 무의미하다 라는 것과는 다른 말일 텐데. 완전히 텅 빈 마음을 가진다는 것. 우리가 마음이라 부르는 그 마음이란 것도 실은 다 허상일 뿐인 거겠지만. 거울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 비추는 그대로를 생각 없이 본성 그대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공부가 깊어지면 사람들은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거나 자신만의 작은 방에 머무르거나 말수가 줄어드는 걸까. 나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어디까지 흘러가서 어디까지 가서 죽을 수 있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 놓여 있다. 언어가 실재의 관념을 그대로 표상하지는 않는다는 생각들. 시라는 것이, 의미 너머의 어떤 것, 문자로 된 리듬이 아닐까 하는 생각들. 그렇게. 심장의 박동소리나 저마다의 호흡처럼, 언어의 어떤 리듬을 통해 심정적인 타격감 같은 것, 심리적인 고양감 같은 것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들. 멀리. 보이지 않는 바다를 본다.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들. 물결들. 물결들. 눈을 감는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 나는 다시 어둠을 본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어둠을. 새롭고도 환한 어둠을. 그것을 쓴다. 그것을 다시 쓴다.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다시 어둠 속에서. 어둠을 향해.

서정과 현실 2013년 가을호

2013.08.20 머리에 꽃을
          
역양
이제니

그 꿈에서 나는 작고 검은 것이었다. 희고 소리 나는 것이었다. 작고 검은 소음. 혹은 희고 둥근 침묵. 꿈속에서의 내 얼굴은 분명하지 않았다. 꿈밖에서와 마찬가지로. 너는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너는 내게로 자꾸만 돌아오고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너를 피부처럼 느끼고 있었다. 우리는 숲속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은과 놋으로 예물을 드리는 자들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을 찾으러 왔다. 너는 말한다. 기다림이란 언제나 내겐 익숙한 자세였습니다. 나는 말한다. 나뭇가지는 사방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무한함 속에서. 폭풍의 하늘을 뒤덮으며 사라지는 구름의 속도로. 나는 끝없이 뻗어나가는 나뭇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물이 자라나는 속도를. 무언가가 사라져가는 현재를. 언제나 그것을 분명하게 목격하기를 바랐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놓아두어라. 각자의 형상 그대로 허용하여라. 사물에 대해 판단하기를 멈추어라. 무질서하게 뻗어나가던 가지의 아름다운 규칙을 알아차리듯. 더할 수 없는 자연의 경이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너는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간다. 어떤 말을 주고받으며. 어떤 침묵 속에서.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그 말을. 사건 없는 사건들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소리와 빛깔을 기억해내듯이. 완전한 망각 속에서. 우연이 만들어내는 무분별한 아름다움 속에서. 우리는 숲길을 걸어간다. 청색과 홍색. 혹은 흑색과 자색 실이 드리워진 나무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흩날리며 흔들리는 것은 슬프군요. 세계의 끝이 넘실거리고 있군요. 나뭇가지 사이로 젖은 책들이 널려 있었다. 반짝이는 햇빛 아래 무수한 책들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한 권 한 권 차례차례로. 그것들은 거대하고도 단단한 집으로 변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집. 아니 단 한 권의 책. 줄줄이 늘어선 나무들은 어쩐 일인지 하나 같이 깊게 긁힌 자국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오랜 상처처럼 보였다. 움푹 패인 나뭇가지마다 물방울이 모여든다. 모여든 물방울이 흘러넘친다. 방울방울 떨어진다. 하나의 물. 하나의 공기. 떨어진 물방울이 바닥으로 스며든다. 흙 속으로 스미는 순간 그것들은 물이라는 고유의 성질을 잃어버린다. 잊어버린다. 정오의 햇빛이 스러진다. 한 코 한 코 성기게 짠 편물의 듬성한 무늬처럼. 벌레 먹은 나뭇잎 구멍 사이로. 하나하나의 세계가. 알알이 들어차 있었고. 그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상하고도 아름다운 격자의 세계였다. 오래된 새로운 세계가 손 안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의식이 꿈의 단면에 끌칼로 새겨 넣은 그 깊은 자상을 해독하기엔 나의 문장은 어눌하기 그지없었고. 우리는 걸어간다. 나란히 걸어간다. 은과 놋으로 예물을 드리러 오는 자들을 기다려야 한다. 너는 다시 말한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이름 모를 짐승들이 소리 없이 지나간다. 소리 없는 것들의 형상을 보여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바람은 나무를 흔든다. 바람은 나무를 흔들고 흔든다. 이 거리에서 저 거리로. 저 거리에서 이 거리로. 우리는 끝없이 끝없이 걸어간다. 드문드문 빈자리를 본다. 꿈이었을까. 꿈이 아니었을까. 세월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물리적 시간은 얼마만큼 일까. 몇주 전 나는 오래 길렀던 개를 잃었고. 개와 함께 했던 세월이. 일순간에. 한꺼번에. 사라진다. 개는 뜬눈으로 죽었고. 오래도록 눈멀었던 나의 늙고 아름다운 개는. 그가 한평생 보아왔던 어둠보다 더 많은 어둠을. 더 깊은 어둠을. 누구도 보지 못한 환한 어둠을 보았는지도 모르겠고. 흰 천에 싸인 채. 굳은 몸이 다시 부드러워질 때까지. 해는 멈추지 않았고. 멈추지 않은 만큼 세월은 흐르고 흘러. 다시 날이 밝았고.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그 작고 검은 것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기름과 향을 가져 왔으니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은과 놋으로 예물을 드리러 온다는 자들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숲은 끝없이 멀어지고. 끝없이 이어지고. 나는 이 소실점의 거리를 너무나도 오래도록 보아왔으며. 앞으로도. 내내. 영원토록. 이 길을 걸어가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혔고. 그것은 슬픔과도 유사한 감정이었고. 무언가가 사라진 날짜 위에 그려둔 작고 검은 동그라미는 점점 희고 둥근 입말로 변해가고 있었고. 이제 내게는 언제든 찾아갈 작은 무덤 하나가 생겼다. 꿈속에서도 그 사실이 슬프게 기뻤고. 기쁘게 슬펐고. 나는. 이 그리움을. 이 기다림을. 그만둘 수 있다. 나는 꿈속의 꿈속에 있다. 자각몽을 꿀 때처럼. 일순간 높다란 언덕 위에 서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까마득한 저 아래를 담담히 내려다보면서. 날아가라. 날아가라. 혼잣말을 하면서. 너는 그 수풀 속에서. 흰 옷을 입고. 짐승의 흰뿔로 만든 길고 가느다란 나팔을 불면서. 너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이 세계의 책들은 문자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소리와 색깔로 이루어져 있음을. 아니 소리와 색깔의 여백으로 가득차 있음을. 네가 그 소리에. 그 빛깔에. 귀 기울일 수 있다면. 눈 열릴 수 있다면. 너의 페이지는 또 다른 페이지로 건너뛸 텐데. 저기 저 소실점 너머로 사라지는 나무들처럼. 아득한 저 너머로 건너갈 수 있을 텐데. 너는 거리의 저 끝에서 눈물처럼 번지듯 은빛으로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고. 나는 작고 검은 글씨처럼. 혹은 희고 둥근 음표처럼. 한 줄에서 또 다른 한 줄로. 위에서 아래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고. 그때. 나뭇가지 위의 무수한 책들 중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펼쳐진 페이지 너머로 어떤 낱말 하나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고. 역양. 곧이어 나무둥치마다 새겨진 저마다의 자상들 위로 교묘하게 감춰진 약호들이 줄줄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은과 놋을 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등불과 향유와 거울과 몰약의 시절로 되돌아가듯이. 역양. 생의 비밀이란 보란 듯이 활짝 펼쳐져 있는 책처럼 단순하고도 선명하게 이미 드러나 있었음을. 당연하다고 믿어왔던 그 믿음들 사이의 균열을. 그 틈새들 속에서 흘러넘치는 물방울의 표면을 읽어내려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내가 읽고 싶은. 내가 쓰고 싶은. 단 한 줄의 문장이라고 생각하면서. 수풀에서 수풀로 건너뛰듯이. 꿈속에서 꿈밖으로 걸어 나왔고. 깨어나 책상으로 가 앉았고. 역양. 언제나처럼 꿈속에 두고 온 너의 얼굴은 분명하지 않았고. 너의 소리를. 너의 색깔을. 제대로. 온전히. 적어 내려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고. 오래전 내가 썼던 페이지들을 펼쳤을 때. 역양. 그 익숙하고도 낯선 낱말 하나를 다시 발견했고. 꿈속에서처럼 페이지는 비어 있었고. 그 뜻을 다시 헤아리기 위해. 찾아 헤맸던 빈자리를 다시 한 번 만지기 위해. 다시 한 번 쓰다듬기 위해. 다시 한 번 채우기 위해. 나는 책상 위로 고개를 숙인다.


현대문학 2013년 8월호

2013.07.10 머리에 꽃을

          

가지 사이
이제니

너는 타오르는 잎을 보고 있었고 나는 너의 눈을 보고 있었다. 잎이 흔들린다. 네가 서 있는 하얀 벽에서 물이 흘러내린다. 천천히. 위로 위로. 자라나듯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내린다.

백색의 슬픔을 기록하는 사람을 보았다.
가지와 가지 사이에서.

맞닿은 두 팔의 그림자. 넘치거나 모자라는 살갗. 이웃의 창문을 탐하는 심정으로 너의 그늘을 쓰다듬는다. 벽은 번지고 이마는 물든다. 눈빛은 붉어지고 말이 쏟아지려는 찰나,

하늘이 깊어진다는 말.
녹색과 녹색 사이에서.

연약함이 자란다.


시와세계 2012년 가을호

2012.08.20 머리에 꽃을
          

분실된 기록
이제니

첫 문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슬픔을 드러낼 수 있는. 슬픔을 어루만질 수 있는.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에서.

꿈속에서 나는 한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다.

펼치자마자 접히는 책
접힌 부분이 전체의 전체의 전체인 책

너는 붉었던 시절이 있었다
너는 검었던 시절이 있었다
검었던 시절 다음엔 희고 불투명한 시절이
희고 불투명한 시절 다음에는 거칠고 각진 시절이

우리는 이미 지나왔던 길을 나란히 걸었고, 열린 눈꺼풀 틈으로 오래전 보았던 한 세계를 바라보았다.

고양이와 나무와 하늘 속의 고양이
나무와 하늘과 고양이 속의 하늘과

산책하기 좋은 날씨였다. 잎들은 눈부시고 흔들리고 아무것도 아닌 채로 희미하게 매달려 있었다.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인가. 나는 지금 순간의 안쪽에 있는 것인가.

아니요. 당신은 지금 슬픔의 안쪽에 있어요.
슬픔의 안에. 슬픔의 안의 안에.
마치 거품처럼.

우리는 미끄러졌고 이전보다 조금 유연해졌다.

언젠가 내가 썼던 기억나지 않는 책
언젠가 내가 읽었던 기적과도 같은 책

지금은 그저 이 고통의 고통에 대해서만 생각하도록 하자. 우주의 밖으로 나갔다고 믿는 자들이
실은 우주 속을 헤매는 미아일 뿐이듯이. 우주의 밖은 여전히 우주일 뿐이니까.
슬픔 안의 슬픔이 슬픔 안의 슬픔일 뿐이듯이.

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지운다.
지운 것을 후회한다. 후회하는 것을 다시 쓴다.

백지와 백치의 해후
후회와 해후의 악무한

텅 비어 있는 페이지의 첫 줄을 쓰다듬는다.
슬픔에는 가장자리가 없고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었다.

펼쳐서 읽어라.
펼쳐서 다시 써라.

분열된 두 개의 손으로 쓰인 책. 너는 어둠 속에서 다시 나타난다.
극적인 빛을 끌고 나타났다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밤은 길어진다. 손은 어두워진다. 너는 다시 한 발 더 어둠 속으로 나아간다.

무수한 괄호들 속의 무수한 목소리들
말과 침묵 사이에 스스로를 유폐한 사람들

이름 없는 이름들을 다시 부르면서
다시 돌아온 검은 시절을 바라보면서

그것은 고통의 고통 중의 잠든 눈꺼풀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흙으로 다시 돌아가듯이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는 듯이


세계의 문학 2012년 여름호

2012.06.04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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