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클랜드. 샌프란시스코.
사진_이에니  



[幕間의 시론] 순간 속에서, 순간을 향해
이제니

멀리 있는 것들을 본다. 순간의 속도로 무한 증식하는 사물들. 매순간 사라지며 나타나는 장면들. 낱낱인 그것들을 가로로 세로로 위로 아래로 규칙 없는 규칙 속에서 이렇게 저렇게 저렇게 이렇게 배열한다. 어떤 모호한 기준들 속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어떤 감각들, 색채나 구도, 질감, 비례 혹은 균형에 대한 본능적이고도 직관적인 감각들을 따라서, 자신의 슬픈 기질, 혹은 어김없이 저지르고야 마는 슬픈 실수들을 복기하듯이, 아름다움에 대한 헛된 열망을 느끼며, 좋아하는 단어카드를 집는 어린아이의 심정으로, 더듬거리는 자가 비좁게 내뱉는 입속의 그 둥근 그믐처럼. 그것이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채로, 그 이야기 끝에서 만나게 될 어떤 백지 상태의 감정을 미처 상기하기도 전에. 그리고, 이 이상한 배열들 위로 떠오르는 흐릿한 이미지가 결국은 단 하나의 장면 속에 숨겨져 있던, 언뜻 읽어 내렸던, 언제나 충동적으로 사로잡히는, 바로 그 이미지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리하여, 하나의 풍경 속에서 힐끗 본 어떤 이미지가, 어떤 결핍이, 어떤 낙차가, 또 다른 단면들 속에서, 또 다른 단편들 속에서, 또 다른 무수한 순간순간들의 총합 속에서 분명하게 되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이내 이 모든 순간들이, 우기가 끝난 한여름의 보도블록 위를 자진해서 형벌을 받듯 배를 끌며 느리게 기어가는 한 마리의 지렁이가 그려내는 그 희미하고도 슬픈 궤적처럼 무용하다고 느끼는 순간, 결국 그렇게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순간, 그런 순간. 그렇게 다시. 그렇게 다시.

중요한 것은 이 세계가 아니다. 이 세계의 조건이 아니다. 그렇다. 그런 것이다. 나는 다시 풀이 죽는다. 나무는 어제보다 조금 더 자란다. 구름은 어제보다 조금 더 죽는다. 바람은 어제보다 조금 더 짙어진다. 하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멀어진다.

그 겨울, 작고 검은 개를 끌고 가던 작고 늙은 여자는 어떠한 속도감도 느끼지 못한 채로 몇 개의 계절을 건너 뛰어 지구 반대편에서 또 다른 작은 개 한 마리에 의지해 한낮의 빛 속으로 사라져간다. 언젠가의 쾌청한 하늘을 가르던 그 희미한 비행운은 몇 개의 시간을 거슬러 최초의 계절 아래에 홀로 앉아 있는 내 어머니의 머리 위를 다시 날아간다. 이름 모를 봄날의 정원에 숨어든 흰 줄무늬 고양이는 그로부터 몇 달 뒤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서 버림받는다.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단지 약하다는 이유로, 단지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이유로, 단지 그 자신이 그 자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옳다. 그러나 그저 옳을 뿐이다. 그 뿐이다. 나는 그것에, 그 방식에, 동의하지 않는다. 어떤 보편적인 사실들에, 어떤 보편적인 방식들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그렇게 뒤섞인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태어나는 그 낱낱의 사물들과 풍경들이 또 다른 낱낱의 시간과 공간으로 이식되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중첩되어 쌓이는 것을 바라봄으로써, 나는 그것들 속으로 간다. 그것들의 아름다움 속으로, 안간힘 속으로, 오직 순간 속에서만 솟아올라 순간 속으로 사라져가는 어떤 희미한 진실 속으로.

세계의 모든 사람과 사물들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같은 방식으로 살아간다. 보편성 속의 아주 작은 차이를 찾아내는 것, 고유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 미세한 차이를 밝히는 것.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쓸 수 있을까. 그 순간순간을 기록하려고 할 때마다 느끼는 절망감을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 속수무책인 느낌이 드는 것은 그것이 사물의 그림자를 새기는 일, 언제나 뒤늦을 수밖에 없는 시간을 좇는 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떤 감정적인 동요를 느끼는 순간들은, 어떤 시간과 공간 속을 순식간에 이동한 듯한 느낌을 받게 되는 순간들은, 나를 둘러싼 이 조건들로부터 문득 초월한 듯한 느낌이 드는 순간들은, 그러니까 어떤 시적인 순간들은, 언제나 어떠한 말도 어울리지 않는, 어떤 말도 필요 없는 순간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각자가 직면하게 되는 무한 앞에서 느끼는 감정과도 닮은, 하나의 한계로 인식해왔던 내 속의 지평을 한 뼘 더 넓혀나가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심장을 울리는 이러한 충만한 순간들은 거대하거나 숭고한 풍경들 앞에서만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게는 아주 사소하고도 익숙한 일상의 순간순간들,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속에서 만나게 되는 소리와 색깔들에서 문득문득 어떤 시적인 느낌들을 받고 압도되는 일이 더 많다. 나아가 이런 순간들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기록하려는, 그 말할 수 없는 순간을 끈질기게 말해보려고 고군분투하는 그런 상태, 절망과 뒤범벅된 그런 심정적 상태에서, 그리고 어느샌가 그런 상태에서 아주 조금이나마 벗어나게 될 때, 나아가게 될 때, 그렇게 나와 사물과의 관계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시각을 얻게 될 때, 배우게 될 때, 바로 그 때, 내 속의 지평을, 오직 나만의 그 고유한 지평을 넓혀나가게 되는 순간임을 느끼곤 한다.

어떤 주제나 소재를 찾으려고 굳이 애쓰지 않으면서, 무엇을 쓰는지 모르는 채로 쓰려는 바로 그것을 써내려가는 것. 순간순간 삶에 대한 애정을 지속적으로 견지할 때에만 가능한 일들. 지금의 나로부터 몇 번이나 더 죽어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그것에 도달할 수 있을지 나는 알 수 없다. 재능과 용기와 행운을 순간순간 재생시킨다는 것. 억지로라도. 억지로라도. 묵묵히 견디면서. 지속적으로 규칙적으로 꾸준히 매일 그것을 조금씩 써나간다는 것.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시간과 시간이 어긋난 뒤에야, 바로 그 어긋남이 나를 나 자신이게 했음을, 내가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음을, 어떤 회한 섞인, 그러나 안도의 마음을 가지고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 그런 순간. 어쩌면 그런 순간이야말로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뒤늦게 다시 태어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생에서 몇 번의 죽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 또한 행운이라는 생각.

도착하는 순간에야 알 수 있는 것을, 그 무엇을 기다리면서. 매일의 책상 위에서. 무언가 내 자신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으로, 내 자신에게 저항하지 않는 방식으로. 어떤 흐릿한 믿음에 의지해서. 모든 순간을 다시 의심하고 다시 부정하면서. 알고 있던 이름을 잊고, 알고 있던 얼굴을 잊고, 알고 있던 표정을 잊고, 알고 있던 색깔을 잊고, 알고 있던 소리를 잊고, 알고 있던 거리를 잊고, 알고 있던 공간을 잊고. 그렇게 마치 처음 본다는 듯 이 세계를 바라보면서. 손가락과 심장으로. 어떤 순간 속에서. 어떤 순간을 향해.


시와 정신 2011년 겨울호

2011.11.30 머리에 꽃을

          

다시 그 호수에서
이제니

너의 손에는 아직 놓지 않은 보이지 않는 끈이 있다. 너를 타인과 구별 짓게 하는 색깔. 너를 온전히 너 자신이게 하는 목소리. 빛이 바래고 키가 자라는 동안에도 물결은 꾸준히 흐른다. 어느날의 물결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너의 얼굴이다. 어느날의 바람은 돌아가고 싶은 어떤 장소이다. 너는 네가 서 있는 이곳이 언젠가 네가 사랑했던 바로 그 장소라고 느낀다. 와본 적이 없는데도 너는 이 색깔들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후로도 너는 네가 사랑했던 장소들을 끊임없이 찾아낸다. 네가 서 있는 바로 그곳에서. 무의식적으로. 의지와 상관없이. 살기 위해서. 견디기 위해서. 조금씩 날이 밝아온다. 너는 네 속의 절망적인 목소리를 비집고 솟아오르는 또다른 목소리를 듣는다. 얼마간의 시간이 더 남아 있다고. 시간 속에서, 시간과 함께. 한번 더 낭비할 시간. 한번 더 나아갈 시간. 그것은 너의 목소리를 닮은 무엇이다. 그것은 너의 목소리를 닮지 않은 무엇이다. 너는 네 손안의 끈을 다시 만지작거린다. 그리하여 너는 어느날의 그 호수에서 처음처럼 다시 너를 만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느날의 그 물결 위에서 처음처럼 다시 우리를 만난다.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http://blog.changbi.com/lit/?p=4852&cat=719


2011.11.25 머리에 꽃을


          

우리 앞에 우리가
이제니

불빛처럼 흔들리는 어떤 사소하고 파편적인 풍경들이 영원처럼 이어질 거라고 예감하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아련하게 행복한가. 종이 인형 같이 얇은 부피감이 아닌, 악수하고 돌아서서 혼자 걸어가는 보도블록 위의 공허한 울림이 아닌, 점자를 읽어 내려가듯 몸에 각인되는 두툼하고 푹신한 어떤 존재들의 생생한 질감.
우리가 바라보는 저 별빛이 이미 오래 전에 사멸한 몇 억 광년 전의 별빛일지라도, 우리가 입고 있는 이 덧없는 육체가 먼지처럼 부유하는 별들의 잔해일지라도, 지금, 여기, 이곳, 나무와 나무가 사랑하듯이, 구름과 구름이 사랑하듯이, 껍데기와 껍데기를 벗고, 맨얼굴과 맨얼굴로 만나는 순간들은 또 얼마나 깊은 울림을 주는지.

우리가 그때 서로에게 별이 아니었다면 또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서로의 양각과 음각, 밝음과 어둠을 보여주는 맨얼굴의 시간들, 걸림 없이 자유롭게, 진심으로 천진하게. 언어를 초월한 곳, 기억을 넘어서는 곳, 시간과 공간을 비껴가는 곳, 미래의 어느 날 떠올려보게 될 때에야 비로소 어떤 별자리를 닮은 소박한 이름 하나를 붙여볼 수 있는 것. 진심이란,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하고 나면 오히려 빛바래기도 하니까. 세상의 모든 반짝이는 것들은 가깝든 멀든 간에 어딘가에 자신을 되비추는 것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 내 앞에 네가, 네 앞에 내가, 우리 앞에 우리가 서 있어서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것뿐이에요, 정말.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http://blog.changbi.com/lit/?p=4808&cat=719


2011.11.25 머리에 꽃을
          

너의 문과 너의 어둠과
이제니

마침 그 곁에 있어 쓰다듬게 되는 늙은 개처럼 헛된 위안을 바라며 오래전 너의 방을 떠올린다. 너의 책상과 너의 의자와 너의 음악과 너의 어둠과 너의 문과 너의 벽과 너의 그늘과 너의 얼굴과. 모든 것이 다 들여다보일 만큼 충분히 환한데도 온전히 어둠 속에 놓여 있는 것만 같던. 내부를 들키지 않은 채로 외부를 응시하는 사람들. 내부의 외부의 내부를 응시하는 사람들. 무언가를 동시에 보는 사람들. 은둔자의 자세로 오래오래 자기 속에 머물러 있던.

모르는 사람의 비밀 서재로 숨어 들어가 손때 묻은 책들을 하나하나 순례하고 싶은 밤. 너의 얼굴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아름답고 현실을 간단히 건너뛰었다는 점에서 영원하다. 기억을 따라가면 마치 네 몸처럼 부르던 너의 노래가 흐르고 그 방의 빛은 내 오랜 기억을 비웃듯 바라볼 때마다 다른 색깔을 들이민다. 그러나, 모서리와 모서리를 흘러내리던 그날의 공기는, 낡은 외투처럼 나를 감싸던 그 목소리는.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http://blog.changbi.com/lit/?p=4713&cat=719


2011.11.25 머리에 꽃을
          

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이제니

난 언제나 감자의 그 다양한 조리법에 감탄하곤 했지. 굽고 삶고 찌고 볶고 튀기고 데치고 으깨고 부치고 끓이고 죽이고 묵히고 익히고 말리고 밀리고 울리고 불리고 부수고 밀치고 망치고 뭉치고 상하고 멍들고 짓누르고 짓무르고 회피하고 보류하고 기다리고 기대하고 묻고 답하고.

그것이 싸구려 인생을 대변한다는 사실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지. 흘러넘친다는 건 이미 전락했다는 말이니까. 어디에서 어디로 굴러 떨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어느새 떠내려왔다는 거지. 원치 않는 어떤 곳에 놓여 있다는 거지.

그날의 우리가 그랬었지. 지나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때 넌 어쩌면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내 앞에 앉아 있었니. 어쩜 그렇게 내 슬픔을 고스란히 지고 앉아 있었니. 맛없는 포테이토 샐러드를 먹으면서. 하릴없이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놨다 하면서. 테이블 위로 일렁이는 희미한 불빛을 남모르게 좇으면서. 돌아갈 수도 나아갈 수도 없는, 흑과 백의 시간 속에 앉아.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http://blog.changbi.com/lit/?p=4620&cat=719

2011.11.19 머리에 꽃을
  Login   [1][2][3] 4 [5][6][7]
Zeroboard / skin by lun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