튈르리의 연인

그때 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겨울 호숫가 위를 한가롭게 떠다니던 잿빛 오리들도, 겨울 호숫가를 바라보던 검은 연인도 아니었다. 그때 내가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가까이 들여다볼수록 더욱더 멀어지는, 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저 이상할 정도의 적당하고도 아득한 거리가 그들에게 낭만성을 부여하는 요소의 전부라는 사실. 피로한 여행자의 눈으로 읽어내려가는 낭만성이란, 대상들 내부에 고여 있는 작은 물웅덩이와도 같은 쓸쓸함, 그 찢어지기 쉽고 변질되기 쉬운 열정을 지나온 권태와 익숙함의 또 다른 외피라는 사실.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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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5 머리에 꽃을
          

세계의 끝 푸른 잔디

이유 없이 가슴이 찢어지는 아침이다. 알 수 없는 고양감. 늘 그렇듯 뒤따라오는 결락의 감정. 뭔가 있어야 할 것이 빠져버린 느낌이라기보단 저기에 뭔가가 있다라는 감정. 그러나 잡을 수도 다가갈 수도 없다라는 감정. 나는 그저 바라본다. 나는 손쓸 도리가 없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이른 아침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비친다. 햇살을 받으며 나뭇잎이 흔들린다. 한 번 흔들리고 두 번 흔들리고 세 번 흔들리고.  흔들릴 때마다 사라지고 흔들릴 때마다 사라지고 흔들릴 때마다 사라지고. 순간순간 사라져가는 어떤 반짝임 움직임 속삭임들. 이젠 그런 것들이 그만 가슴 아플 때도 됐는데. 자꾸만 어딘가 저 너머를 바라보게 되는 무수한 시간들 위로 저기 저곳이 여기 이곳과 겹쳐 흘러가는 날들. 어느 봄, 그 호수의 끝도 그랬었지. 호수의 끝이 아니라 호수의 시작이었는지도. 푸른 잔디의 끝이 아니라 푸른 잔디의 시작이었는지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울진 않았지. 뭐 그런 것들 그런 것들 그런 것들. 뭐 그런 쓸쓸한 것들 쓸쓸한 것들. 뭐 그런 아름답고 쓸쓸한 것들.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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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5 머리에 꽃을
          

끝없이 이어지는 춤을 추면서

우리는 앞으로 앞으로 걸어갔지. 말없이. 손나팔을 불듯 두 손을 흔들면서. 끝없이 이어지는 춤을 추면서.
머나먼 발칸 반도의 끝자락을 떠도는 이름 없는 유랑 악단처럼. 멈추면 사무칠까봐 더 더 걸었지.
뒤처진 쪽을 슬쩍슬쩍 바라보면서. 서로가 서로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주의를 기울이면서.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걸었지. 언제나 그렇게 걸어왔지. 춥고 어두운 길에선 더더욱 더.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이 사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공식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람이 불고 있었지. 숲은 어디에도 없었어. 불과 꽃. 재와 그림자. 없는 들판과 없는 언덕.
물결처럼 늘어나는 장방형의 모서리들. 별들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지. 어떤 노래가 꿈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지.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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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8 머리에 꽃을
          

밤의 서점

밤이 백지 위의 문장들처럼 흐른다. 어제의 페이지를 넘긴다.
이 종이는 창백하고 모종의 전언을 숨기고 있다.
채워지면 채워질수록 더 많은 불가능성을 열어 보이는 백지들.
어찌할 수 없는 불가능성이란 어찌할 수 없는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라고 쓴다.

밤의 서점 앞에서 손가락으로 문장을 훑어 내리던 이름 모를 독학자의 뒷모습을 생각하는 밤.
희미한 불빛에 의지한 채로 마음속 페이지를 넘긴다. 밤은 길어진다. 손가락은 어두워진다.
이 무수한 문장들 끝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결국 내 속의 저 깊은 우물인지도.

이런 밤이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단 한권의 책을 쓰고 싶어지는 것이다.
일평생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원했던 자의 목소리를 덧입은 채로.
다다르지 못하는 나라를 꿈꾸는 흐릿한 열망의 눈길로.
마치 처음 본다는 듯 길어진 내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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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1 머리에 꽃을
          

그 빛이 내게로 온다

빛이 축복처럼 쏟아져 내린다. 숭고한 순간을 목도하듯 너를 바라본다.
너는 어둠의 왕관을 쓰고 영원처럼 내 앞을 지나간다.
모든 결정적인 순간이 그러하듯 너는 느리게 흐르다 일순 멈추어 선다.
나는 언제든 매혹될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언제든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다.
아름다움 앞에서. 슬픔 앞에서. 무용함 앞에서.
오직 그 순간 그때에만 만들어 낼 수 있는 한 울림 앞에서.

천장이 높은 텅 빈 회랑에서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길고 긴 모음을 발음하고 싶은 밤이다.
공명하는 입자들에 오래오래 둘러싸여. 희열 속에 있다는 것을 아는 채로 희열 속에 있듯.
순간을 잊는 방식으로 순간을 살아가듯. 빛과 어둠을 동의어로 발음하며.

희미하게. 드높게.

그 빛이 내게로 온다.


창비 웹진 <창문엽서> 금요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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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20 머리에 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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